第1章
나는 20조 자산의 재벌가 손씨 집안의 막내 아가씨이자 업계에서 소문난 바보다.
어릴 때부터 멍하니 있는 일이 많았고, 아무리 다그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타고난 인재였다.
오빠는 만 18살에 월가를 휩쓸었고 언니는 만 20살에 박사 학위를 두 개나 따냈다.
그랬기에 부모님은 도무지 내가 손씨 집안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친자 확인 검사만 무려 18번을 했고, 이름난 의사와 전문가란 전문가도 모두 불러들였다.
십여 년을 그렇게 난리를 치고 나서야, 가족들은 결국 하는 수 없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사실 내가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전생의 나는 한 번도 패소한 적 없는 유능한 변호사였다.
평생 할 말을 전생에 다 해 버렸으니, 이번 생에는 조용히 벙어리로 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SS그룹이 악의적인 공매도에 시달리며 파산 위기에 몰렸다.
경쟁사에서 인수합병 계약서를 들고 회사까지 들이닥치자, 아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오빠도 계약서 조항을 샅샅이 뒤졌지만 도무지 허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룹에서 거금을 들여 10년 동안 고용했던 수석 변호사는 진작에 상대방에게 매수된 상태였다.
변호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처럼 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회장님, 사인하시죠. 이것이 손씨 집안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계약서는 제가 검토했고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아빠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듣고 있자니 속이 답답해서 더는 연기를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온 가족이 경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서 계약서를 세 번째 장으로 넘겼다.
“계약서와 첨부한 문서 사이에 관할권 충돌이 있네요? 여기에 사인하면 손씨 집안은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데다가 20조원 채무까지 떠안게 되고요.”
그런 뒤 고연준을 바라보았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고 변호사님, 원래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도 잘하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너무 후하게 나오시는 것 같은데요?”
제1화
고연준의 목소리는 봄물처럼 부드러웠다.
고연준은 재단이 잘된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고, 금테 안경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심지어 살뜰하게 미지근한 물까지 한 잔 따라서 아빠 손정욱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룹 최상층의 회의실 전체는 쥐 죽은 듯 고요했고, 공기에는 숨이 막힐 듯한 절망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나는 구석 소파에 앉아서 손에 든 큐브를 기계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딸깍, 딸깍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 사람들의 눈에 나는 그저 머릿수를 채우는 용도이자, 사람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였기 때문이었다.
내 맞은편에 앉은 유태오는 커피잔을 들어서 한 모금 홀짝였다.
오늘 이 자리를 밀어붙인 장본인이었다.
동시에 재계에서는 사람을 잡아먹고도 뼈 하나 남기지 않는 웃는 얼굴의 늑대로 악명 높은 인물이기도 했다.
“손 회장님,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아요.”
“오늘 밤 12시가 지나고 내일 아침 장이 열리면, SS그룹의 주가는 바닥을 뚫고 곤두박질칠 거예요.”
“그때가 되면 이 몇천억 원조차 손에 넣지 못하실 거고요.”
유태오의 나른한 말투는 마치 내일의 날씨라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빠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고 이마에는 핏줄이 불거졌다.
아빠는 탁자 위에 놓인 두툼한 인수합병 계약서를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라도 되는 것처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에 서 있는 오빠 손재우는 밤을 새운 탓에 눈이 새빨갰다.
만 18살에 월가를 휩쓴, 손씨 집안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사업의 천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만년필을 꽉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린 채,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약서의 글자 하나하나를 샅샅이 훑었지만 그 어떤 빈틈도 찾아내지 못했다.
“오빠, 다시 한번 봐.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
언니 손시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늘 차갑고 도도하던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눈시울마저 붉어져 있었다.
오빠가 맥없이 손을 풀자, 만년필이 매끈한 탁자 위를 굴러가며 맑은 소리를 냈다.
“저쪽 자금이 우리 세 배야. 공매도 수법이 너무 은밀해서 우리가 반격할 최적의 시기를 놓쳤어.”
“지금은 자금줄까지 끊어졌고 은행에서는 대출을 회수하고 있어. 신이 내려와서 우리를 돕지 않는 한 방법이 없어.”
오빠는 눈을 질끈 감았고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었다.
이윽고 고연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오빠 곁으로 걸어가서 어깨를 토닥였다.
“도련님, 도련님 마음이 어떤지 저도 잘 알아요.”
“SS그룹은 저한테도 집이나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10년을 일했고요. 오늘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저예요.”
“하지만 법은 증거와 조항을 근거로 하고 사업은 실력으로 말하죠.”
“유 대표 쪽 조건이 가혹하긴 해도, 적어도 앞으로 체면치레를 하면서 살 수 있을 거예요.”
“산이 남아 있는 한 땔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법이고요.”
고연준의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손씨 집안을 위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 말들을 구석에 앉아 듣고 있자니 내 속이 메스꺼웠다.
전생에 나는 한 번도 패소한 적 없는 업계 최고의 변호사였다.
그렇기에 이런 위선적인 얼굴의 인간들은 지겹도록 봐 왔다.
제2화
저 계약서에 무슨 수작이 숨어 있는지는 목차만 훑어봐도 훤히 보였지만, 내가 굳이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전생에서는 사건 때문에 밤을 새우다 과로사를 했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조용한 벙어리로 살고 싶었다.
집안이 망하면 망하는 거고, 정 안 되면 신탁기금이나 좀 챙겨서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지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큐브를 돌렸다.
딸깍, 실수로 한 칸을 잘못 돌리는 바람에 큐브가 캐시미어 카펫 위로 떨어졌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쥐 죽은 듯 고요한 회의실에서는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 쏠렸고, 아빠의 눈에는 짙은 짜증과 실망이 스쳤다.
오빠도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언니는 허리를 굽히고 큐브를 주워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채윤아, 착하지? 밖에 휴게실에 가서 놀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고 나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심지어 주머니에서 박하사탕 하나를 꺼내서 껍질을 벗긴 뒤 내 입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
“언니가 여기 일이 있어서 그래. 여기 있으면 아빠한테 방해돼.”
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빛에는 화 대신 그저 쓸모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한 연민만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손씨 집안 사람들의 교양이었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때리거나 함부로 다그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장 다정한 모습으로 나를 이 집안의 중심에서 조금씩 떼어 냈다.
이때, 고연준도 다가오더니 몸을 낮추면서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흠잡을 데 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막내 아가씨, 말 들으세요.”
“밖에 제일 좋아하시는 작은 케이크가 있어요. 비서가 같이 가서 만화도 보여 드릴 거예요. 어때요?”
그러면서 문밖을 향해 손짓했다.
“이 비서, 막내 아가씨 모시고 나가고 문 잘 닫아.”
나는 입에 박하사탕을 물고 있었다. 달면서도 씁쓸한 맛이 입속에 감돌았다.
고연준의 그 말은 대놓고 주제넘게 나서는 행동이었다.
손씨 집안에서 10년을 일했지만 고연준은 돈을 주고 고용한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개가 주인을 내쫓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가족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가시죠, 막내 아가씨.”
이 비서가 들어와서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았다.
“고 변호사님, 굳이 서둘러 내보내실 것 있나요?”
유태오가 갑자기 웃더니, 손에 든 커피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흥미롭다는 눈길을 내게 보냈다.
“이분이 업계에 소문난 그 손씨 집안의 막내 아가씨죠?”
말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치 따귀라도 갈겨서 손씨 집안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후려친 듯했다.
아빠의 안색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했다.
오빠는 홱 고개를 돌려서 날 선 눈으로 유태오를 노려보았다.
“유 대표님, 사업 이야기에 가족을 끌어들이지는 마시죠. 채윤이는 지능이 정상적이지 않아요. 그러니 예의를 지켜 주시죠.”
오빠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평소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본능적으로 나를 감쌌다.
유태오가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사장님, 오해하셨어요. 제가 어떻게 존중하지 않겠어요?”
“저는 그저 손씨 집안의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니, 온 가족이 나란히 지켜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이 막내 아가씨에게도 보여 드려야죠. SS그룹이 본인들 손에서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요.”
심장을 후벼 파는 말에 화가 가득 난 언니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문밖을 가리켰다.
“유태오 대표님, 말씀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곧 고연준이 곧바로 일어서서 언니 앞을 막아서더니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말투는 역겨울 만큼 진지하고 공손했다.
“대표님, 아가씨도 순간 다급해서 그런 거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막내 아가씨가 여기 계시는 게 확실히 적절하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만에 하나 놀라기라도 하면 회장님 마음도 편치 않으실 테고요.”
고연준은 고개를 돌려 아빠를 바라보았다.
“회장님, 그렇지 않나요?”
아빠가 나를 깊이 바라보았다.
피로가 가득한 그 눈길에는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과 완전히 체념한 사람의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내가 8살이던 해, 오빠는 나에게 글을 가르쳐 주겠다며 월가의 연봉 백만 달러짜리 자리를 마다하고 꼬박 1년을 집에서 나와 함께 있었다.
제3화
오빠는 글자 카드를 들고 몇 번이고 읽어 주었다.
나는 무심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결국 오빠는 카드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눈시울을 붉힌 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어. 빈둥거리는 사람 하나쯤은 우리가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내가 10살이던 해, 언니가 외국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불러왔다.
차가운 기계들이 하나둘 내 머리와 이어졌다.
검사 결과, 내 대뇌 피질 활성도는 보통 사람과 달라서, 정상적인 언어 논리를 형성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니는 결과지를 들고 문밖에서 밤새 울었다. 그 뒤로는 아무도 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말할 필요도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이는 내가 가장 원하던 삶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새장이 남의 손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려고 하고 있었다.
“데리고 나가.”
아빠가 마침내 사포에 갈린 것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채윤이를 들여보내지 마.”
이 비서는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고 문밖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두 발은 마치 카펫에 뿌리를 내린 것 같았다.
이 비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힘껏 나를 잡아당겼다.
“막내 아가씨, 떼쓰지 마시고 어서 가시죠.”
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저 탁자 위의 계약서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고연준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한 채 내 곁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아빠를 화나게 해선 안 되시죠.”
“지금은 발작할 때가 아니에요. 말 들어요. 이따가 제가 사탕 사 줄게요.”
발작.
내 가족 앞에서는 막내 아가씨라고 부르더니, 가까이 다가와서는 내가 발작을 일으킨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안경 뒤의 고연준의 두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고연준은 내 눈길에 등골이 서늘해졌는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마 바보라고 생각한 사람의 눈빛에서 카리스마를 내뿜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자 흠칫했을 것이었다.
‘착각이야. 분명 착각이야.’
“아직도 안 나가고 뭐 해!”
아빠가 갑자기 탁자를 내리치자, 잔 속의 물이 튀면서 원목 탁자 위로 쏟아졌다.
“제가 직접 나가라고 할게요!”
오빠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나를 안으려 했다.
“채윤아, 오빠가 안고 나갈게.”
그 손이 내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유태오가 손목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이제 5분 남았어요.”
“회장님, 제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요.”
“사인하지 않는 게 더 기개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법정에서 뵙죠.”
유태오가 몸을 일으켜 느긋하게 정장 재킷의 단추를 채웠다.
“다만 그때는 평화로운 인수가 아닐 거예요. 손씨 집안의 자산은 강제 청산될 거고요.”
“사모님과 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막내 아가씨는 아마 길거리에 나앉게 되겠지요.”
유태오의 말은 아빠의 약점을 정확히 찔렀다.
곧 아빠의 어깨가 푹 꺾였고 순식간에 열 살은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사인하죠.”
이 네 글자가 천근만근 같이 느껴졌다.
고연준이 곧바로 계약서를 아빠 앞으로 밀어주더니, 만년필 뚜껑을 열면서 공손하게 건넸다.
“회장님, 현명한 결정이세요.”
검은 몽블랑 만년필이 천장의 조명을 받아서 차가운 빛을 뿜었다.
아빠의 손은 허공에 오래 머물렀고 좀처럼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언니도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끝내 눈물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예요? 고 변호사님?”
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고연준을 바라보았다.
고연준의 눈에 지극히 은밀한 안쓰러움이 스쳤지만, 이내 그 특유의 부드러운 표정에 의해 가려졌다.
“아가씨,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절대 회장님이 사인을 하시게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유 대표님 뒤에 있는 해외 자본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우리한테는 이제 아무런 카드도 없어요.”
고연준은 이내 몸을 돌려 유태오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유 대표님, 손 회장님께서 사인하신 뒤에는 약속을 지켜 주시기 바랄게요. 손씨 집안 사람들 명의로 된 신탁기금 몇 개는 남겨 주세요.”
제4화
“이게 저희의 마지막 마지노선이에요.”
유태오가 시원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물론이죠. 저 유태오는 비즈니스에서 신용을 가장 중하게 여겨요.”
참으로 대단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입안의 박하사탕을 잘게 깨물었다.
고연준은 지난 10년 동안 손씨 집안 사람들의 성정을 너무나 훤히 꿰뚫고 있었다.
아빠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았고, 오빠의 약점이 어디인지 알았다. 어떤 다정한 말로 언니가 저항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고연준은 자신은 할 만큼 했고,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착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손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기꺼이 구렁텅이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했다.
이윽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회의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그 계약서에 손을 대려고 하자, 이번에는 언니가 나를 붙잡았다.
언니의 손은 차가웠지만, 이길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제자리로 끌어당겼다.
“채윤아, 떼쓰지 마.”
언니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부드러웠다.
“얌전히 앉아 있어. 곧 끝나.”
언니는 내 어깨를 눌러서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다들 나를 위협될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판을 망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억지로 달래야 하는 짐이자 위기의 순간에 방해만 되는 장식품이라고 여겼다.
고연준은 내가 의자에 눌려 앉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아주 살짝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만년필을 앞으로 내밀었다.
“회장님, 사인하시죠.”
아빠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에는 이미 절망감이 가득했고 얼굴은 잿빛이었다.
만년필을 받아 든 아빠의 손이 심하게 떨리면서, 펜촉이 종이 위에 검은 잉크 자국 하나를 남겼다.
“사인하시면, 모든 게 끝날 거예요.”
유태오가 한쪽에 서 있었다.
마치 사냥감이 덫에 걸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냥꾼처럼 입가의 웃음이 점점 짙어졌다.
나는 아빠의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전생의 산더미처럼 쌓인 사건 기록들이 떠올고, 법정에서 말재주를 겨루던 날들도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이번 생에는 절대 법이라는 영역에 다시 들어가지 않겠노라 맹세했었다.
또한 인간의 밑바닥을 볼 수 있는 일에는 다시는 발을 담그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고연준의 저 위선적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손씨 집안 사람들이 한 걸음씩 벼랑 끝으로 내몰리면서도 가해자에게 고마워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치미는 불길을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듣고 있자니 속이 뒤집히네. 정말 지긋지긋하다.’
아빠의 펜촉이 첫 획을 그으려는 순간,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언니의 손을 단번에 뿌리쳤다.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빨랐다.
나는 곧장 탁자 앞으로 달려가서 그 계약서에 사인을 못 하게 손바닥으로 눌렀다.
“채윤아!”
오빠가 낮게 소리치며 성큼 다가와 나를 끌어내려고 했다.
“놔! 그만 좀 떼써!”
오빠의 말투에 화가 묻어났다.
나는 오빠의 말을 무시한 채, 되려 그 두툼한 서류를 집어 들고는 세 번째 장까지 넘기고는 탁자 위에 세게 내리쳤다.
이윽고 고연준이 굳어 버리더니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서 서류를 빼앗으려고 했다.
내가 눈을 들어 올려 차갑게 고연준을 한 번 흘겨보자, 허공에 뻗었던 고연준의 손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회의실 전체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는 또렷하고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생을 살아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내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기도 했다.
“계약서와 첨부한 문서 사이에 관할권 충돌이 있네요? 여기에 사인하면 손씨 집안은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데다 20조 원 채무까지 떠안게 되고요.”
나는 고연준을 바라보았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고 변호사님, 원래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도 잘하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너무 후하게 나오시는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