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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Novel 완결

진지희는 남편 유명훈의 99번째 내연녀 허나영과의 데이트 현장을 덮쳤다가, 또 한 번 사고로 계단에서 굴렀다. 그 바람에 8개월 동안 품었던 아이를 그 자리에서 잃게 되었다. 사실 그런 사고가 이미 5번째였다. 그런데도 진지희는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혼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고, 끝까지 원망 한마디 하지 않았다. 8년 전 유씨 집안의 어르신인 강현숙이 억지로 서명하게 한 굴욕적인 계약서 때문이었다. 1년 안에 아이를 낳으면 200억 원, 3년 안에 아이를 낳으면 100억 원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8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으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일에 더는 관여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올해가 딱 8년째였다.

챕터 (1)

第1章

진지희는 남편 유명훈의 99번째 내연녀 허나영과의 데이트 현장을 덮쳤다가, 또 한 번 사고로 계단에서 굴렀다. 그 바람에 8개월 동안 품었던 아이를 그 자리에서 잃게 되었다. 사실 그런 사고가 이미 5번째였다. 그런데도 진지희는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혼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고, 끝까지 원망 한마디 하지 않았다. 8년 전 유씨 집안의 어르신인 강현숙이 억지로 서명하게 한 굴욕적인 계약서 때문이었다. 1년 안에 아이를 낳으면 200억 원, 3년 안에 아이를 낳으면 100억 원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8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으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일에 더는 관여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올해가 딱 8년째였다. 제1화 퇴원하던 날, A시 사람들은 전부 진지희가 웃음거리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선 4번처럼 악다구니를 쓰면서 내연녀 허나영을 찾아가 따지기를 바라면서. 심지어 누군가는 인터넷에 실시간 인기 글까지 올렸다. [진지희는 이번엔 어떤 방법으로 허나영을 죽일까?] 그 질문 하나에 댓글 창은 이런저런 댓글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다. [진지희가 몇 번 유산한 게 전부 허나영 때문인 거 모르는 사람 있어? 99번째 내연녀가 유 대표 진짜 사랑인가 보네. 애지중지하면서 옆에 끼고 있잖아.] [진지희는 멍청하고 욕심만 많은 여자야. 돈 때문에 재벌가에 붙어서 오늘 이 꼴이 난 것도 자업자득이지! 진작 이혼을 당했어야 해!] 그런데 뜻밖에도 진지희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그 이혼 찬성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고는 본계정으로 답글을 달았다. [맞는 말씀이에요.] 이 한마디에 온 인터넷이 뒤집혔다. 유명훈의 인플루언서 친구까지 참지 못하고 생중계를 켜고 본인에게 확인을 받으러 갔다. “명훈아. 너 진짜 대단하구나? 진지희처럼 상대하기 어려운 미친 여자를 어떻게 길들였어? 우리 팬분들한테 그 비결 좀 공유해 줘.” 유명훈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 대신에 무심하게 휴대폰을 꺼내서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저택 금고방에 가셨어요.] 피식 웃은 유명훈은 생중계 링크를 진지희에게 보내고는 비웃으면서 카메라를 보았다. “길들이긴 뭘 길들여? 돈 받고 떨어졌을 뿐이야. 천성은 안 변해.” “나랑 내기할래? 지희가 이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만드는데 20억으로 될지 안될지? 넌 어떻게 생각해? 지희야?” 그 순간, 생방송 링크를 눌러서 유명훈이 비아냥거리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진지희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통증이 끊임없이 진지희를 괴롭혔다. 유명훈의 눈에 자신은 영원히 돈을 목숨처럼 여기는 천한 여자로 보일 것이었다. 5번째 유산이었다. 심지어 뱃속에서 이미 사람의 모습을 완전하게 갖춘 자기의 친자식이었는데도, 유명훈은 돈만 주면 자신이 입을 다물고 그 돈을 받아 갈 거라고 생각했다. 진지희는 손을 들어 어느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곧바로 인터넷 생방송을 나온 뒤 저택의 금고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눈앞에는 금괴며 보석이며 골동품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아무거나 하나만 집어도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진지희는 그것들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가장 안쪽에 있는 수납장으로 곧장 걸어가서, 서랍 속에서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사실 8년 전, 진지희가 유씨 집안에 시집올 때 서명한 계약서는 2부였다. 유명훈이 봤던 한 부 외에도,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는 별도의 계약서가 한 부 더 있었다. [8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을 경우, 부부 양측은 혼인을 계속 이어 나갈지 각자 선택할 수 있다.] 진지희는 계약서에 적힌 문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시야가 점점 흐려지더니, 동시에 머릿속 깊이 묻어 두었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8년 전. 진씨 집안은 원수의 계략에 휘말려 파산했고, 아버지는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 결국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혼담이 오가던 유씨 집안에 진지희를 맡겼다. 유명훈은 어릴 때부터 진지희를 유난히 아꼈다. 그래서 결혼 첫해, 두 사람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행복하게 지냈다. 봄이면 네팔로 데려가 와인 축제에 함께 갔고, 여름이면 뉴질랜드 리마커블스에서 스키를 타며 더위를 피했다. 가을이면 캐나다에 데려가서 단풍 거리를 걸었으며, 겨울이면 아랍에미리트에 데려가 사막을 걸었다. 그렇게 결혼 후의 두 사람의 생활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달콤했다. 한때 세상 사람들은 두 사람을 천생연분이라 불렸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벌가의 진짜 사랑이라면서, 다른 사람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산산이 부서진 것은 진지희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다. 진지희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명훈에게, 진지희가 강현숙과 맺은 혼전 계약서가 발각된 것이다. 유명훈은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미친 사람처럼 진지희를 몰아붙였다. “진지희, 너 나를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지? 나하고 결혼한 것도 돈 때문이었어?” 말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유명훈이 실수로 진지희를 밀어 넘어뜨렸다. 두 사람의 첫 아이는 그렇게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퇴원한 뒤 두 사람의 사이는 빙산보다 더 차갑게 변해버렸다. 진지희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 계약서에 서명한 거라고 수없이 설명했다. 하지만 유명훈은 이미 진지희를 돈에 눈이 먼 진심이라고는 없는 여자로 단정을 내린 뒤였다. 그래서 대놓고 몇 번이고 바람을 피웠다. 내연녀를 별자리 순서로, 혹은 전국의 모든 성씨를 모으듯 갈아 치웠다. 진지희에게 피임 도구를 사 오게 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기게 했다. 또한 바닥에 무릎 꿇고서 다른 여자와 즐기는 걸 보게 한 뒤 뒷정리까지 시켰다. 처음에 진지희는 울고 소란을 피우기도 했고 멘탈이 무너지기도 했다. 심지어 유씨 집안의 사모님이라는 신분을 앞세워서, 사람들을 데리고 그 내연녀들을 찾아가서 가만두지 않았다. 그런 드센 행동들을 할 때마다 A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렸다. 유명훈은 진지희가 무너지는 모습을 짓궂은 눈으로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또 다음 상대를 찾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며 끝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다 3년 전, 99번째 내연녀 허나영이 나타났다. 진지희는 또다시 허나영을 찾아갔다. 그러자 진지희는 경호원들을 시켜서 허나영을 필리핀의 한 지역으로 보내 버렸다. 결국 진지희는 그곳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유명훈은 처음으로 총을 진지희의 이마에 겨누더니 따지면서 윽박질렀다. “말해. 나영이 어디로 보냈어? 걔가 못 돌아오면 너도 같이 묻힐 줄 알아.” 허나영은 돌아온 뒤 의기양양한 얼굴로 진지희를 도발했다. 진지희는 결국 참지 못하고 허나영의 뺨을 한 대 때렸다. 그날 밤, 암흑가의 격투장으로 끌려간 진지희는 샌드백 안에 넣어진 채 99대를 맞았다. 겨우 풀려났을 때, 진지희는 막 생긴 아이를 또다시 유산하고 말았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은 셀 수 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아이를 잃고 나서야 진지희는 완전히 깨달았다. 유명훈은 정말로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두 사람의 감정은 이미 뿌리까지 썩어 버렸다는 것을. 이제 8년 계약이 만료됐으니, 이 모든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진지희는 계약서를 들고 저택을 나와서 곧장 법률사무소로 향했다. “장 변호사님, 이혼 절차 진행 좀 부탁드릴게요.” 제2화 법률사무소 건물을 나서자 밖에는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었다. 이윽고 콩알만큼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졌다. 진지희는 길가에 서 있다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때 유명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악의적인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물건은 실컷 챙겼어?] 진지희는 잠시 말이 없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지희, 너 정말 천성은 안 변하는구나. 내 돈 챙겼으면 당장 집에 가서 안방 깨끗이 치워. 오늘 밤 나영이랑 같이 잘 거야.] 이혼을 결심했는데도 진지희의 심장은 콱 조여들었고 코끝은 시큰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쓴맛을 억지로 삼키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알았어.” 그런데 그런 순종적인 태도는 유명훈을 만족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분노를 자극했다. 음침하고 냉랭한 목소리가 독침처럼 수화기 너머에서 날아왔다. [그래, 너 진짜 대단하다. 진지희, 넌 정말 돈만 있으면 양심마저도 다 파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고 진지희는 빗속에 서서 넋을 놓고 있었다.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지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서야 진지희는 곧 정신이 들었는지 아주머니를 쳐다봤다. “아가씨, 왜 그래요? 괜찮아요?” 그제야 진지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바닥에서 살을 파고드는 통증이 밀려왔다. 휴대폰을 움켜쥔 손바닥이 금속 모서리에 눌려서 피가 배어 있었다. 그 주변은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진지희는 자신이 아직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흠뻑 젖어 있어서, 얼른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하고 안방을 치울 생각이었다. 스마트 도어록에 지문을 대자, 무단 침입이라는 안내가 떴다. 진지희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출입 권한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지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손을 들어 가볍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초인종을 열댓 번 눌러 봤지만 여전히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렇게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 속에서, 진지희는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은 채 문가 구석에 웅크리고 꼬박 두 시간을 버텼다. 추위에 몸은 덜덜 떨린 데다가 이마는 열이 펄펄 나서 머리가 자꾸 어지러웠다. 마침내 삐걱 소리와 함께 저택 대문이 안에서 열렸다. 집사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 나오더니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그 표정에는 동정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사모님,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대표님께서 유씨 집안의 돈을 받았으면 유씨 집안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 2시간은 가벼운 벌이니 앞으로는 분수를 지키시기 바라신다고요.” 진지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미 정신이 혼미해 정상적으로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유명훈이 일부러 자신을 문밖에 세워 추위에 떨게 했다는 점, 그 한 가지만큼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자조하듯 웃은 진지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말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는 내내 정신이 아득했다. 그 뒤에는 그저 조금 남은 정신력으로 애써 버티면서 안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게스트룸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져서 의식을 잃었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 진지희는 자신의 몸 안에서 때로는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다가, 때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남극의 빙하 속으로 내던져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숨이 막힐 듯한 강렬한 질식감에 절망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깨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누가 엄청난 힘으로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곧 몸이 바닥에서 그대로 끌려 올라가더니, 곧이어 뺨을 사정없이 연달아 맞았다. 그 순간 허나영의 비명이 저택 전체를 뒤흔들었다. 허나영은 옷이 반쯤 벗겨진 채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여자의 뒤로는 방문 밖에서부터 이어진 옷가지가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곧 유명훈이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안방 바닥에 누워서 뭐 하는 짓이야? 일부러 나영이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이러는 거야?” 그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린 진지희는 마침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다. 게스트룸까지 가지도 못한 채 안방에서 쓰러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유명훈과 허나영은 복도에서부터 참지 못하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이곳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허나영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오빠, 저 여자 일부러 그런 거야. 이런 얘기가 퍼지면 나 앞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 말을 마친 허나영은 엉엉 울며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곧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자, 유명훈의 눈에 순간 어두운 빛이 스쳤다. 유명훈은 곧장 앞으로 달려가서 허나영을 안정적으로 받아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진지희에게 버럭 소리쳤다. “아직도 안 나가고 뭐 해? 당장 꺼져!” 하지만 허나영은 죽어라 몸부림치면서 울고 소란을 피웠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그중 하나였던 크리스털 화병이 진지희의 이마에 거세게 부딪혔다. 쨍그랑! 크리스털 유리가 머리 위에서 산산이 깨지면서, 이마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피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가뜩이나 어지럽던 진지희는 그 충격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살을 저미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자, 진지희는 멍하니 손을 들어서 이마의 상처를 감쌌다. 손끝에 뜨거운 감촉이 느껴지자 그제야 열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자신이 고열에 시달릴 때마다 유명훈은 몹시 걱정했다. 조금이라고 빨리 열을 내려 주겠다며 냉동창고에 들어가서 자기 몸을 차갑게 식힌 뒤, 돌아와서 진지희를 꼭 끌어안아 주기도 했다. “지희야, 네가 아픈 걸 보는 게 내가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워. 할 수만 있으면 내가 대신 아프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설레던 그 순간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서로를 향한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고통뿐이었다. 죽어야 비로소 끝날 만큼 지독한 고통이었다. 힘없이 서 있는 진지희를 바라보던 유명훈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두 손을 무의식적으로 움켜쥐었다. 유명훈이 막 다가가려는 순간, 허나영이 서러운 목소리로 흐느꼈다. “오빠, 그냥 나 놔줘. 나 갈래!” “예전에는 아무리 그래도 바닥에 무릎 꿇고 고개도 못 들게 했잖아. 이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건 나를 모욕하려는 거 아니야?” “여기는 자기 안방이고, 나는 들어올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려는 거잖아!” 그 말에 유명훈은 허나영을 허리째 안아 들어 올리면서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화내지 마. 내가 대신 갚아 줄게.” “가자, 침대에 먼저 앉아 있어.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말을 마친 유명훈은 진지희를 밀쳐 내고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진지희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러다 허리가 낮은 수납장의 모서리에 강하게 부딪혔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휩쓸면서, 진지희는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자신이야말로 비열하고 더러운 내연녀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진지희는 자조하듯 비참하게 웃더니,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일어섰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몸이 안 좋아서...” “몸이 안 좋아?” 유명훈이 시퍼렇게 굳은 얼굴로 말을 끊었다. “이제는 핑계를 대는 것도 이렇게 어설퍼졌어? 돈을 손에 넣고 나니까 이젠 연기하는 것도 귀찮아진 거야?” “너 정말 한결같이 사람을 역겹게 만드는구나!” 진지희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더는 해명할 말조차 없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유명훈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왜 할 말도 없어? 좋아. 그렇다면 딸이 잘못했으면 아버지가 책임을 져야지!” “거기 누구 없어요? 요양병원에 연락하세요. 우리 장인어른 잘 좀 모시라고요!” 제3화 “뭘 하려는 거야?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 우리 아빠는 건드리지 마!” 진지희는 두려움에 눈을 크게 떴다. 더는 자존심 따위를 챙길 여유도 없었기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유명훈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유명훈은 진지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문밖에 있는 집사를 향해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끌어내세요. 더 이상 나영이 눈에 거슬리게 하지 말고요!” 집사는 곧장 다가와 거칠게 진지희를 안방 밖으로 끌어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그대로 세게 닫혔다. 진지희는 문밖에 무릎을 꿇은 채 울면서 애원했다. “제발 부탁이야. 우리 아빠는 건드리지 마!” “이미 식물인간이잖아. 정말 더는 견디지 못해!” 하지만 방 안에서는 격정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온 그 소리가 진지희의 마지막 동아줄마저 완전히 끊어버렸다. 한 번 밀려온 파도 위로 또다시 더 큰 파도가 덮쳐 온 것 같았다. 굴욕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과 같은 절망감이었다. 진지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고열에 시달리는 몸도, 온몸을 짓누르는 극심한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문밖의 사나운 비바람 속으로 뛰어들었다. 날씨가 워낙 나빴기에 진지희는 택시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지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우 속을 10킬로미터는 족히 되는 거리를 미친 듯이 달렸다. 몇 번이고 진흙탕에 세차게 넘어졌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서 계속 달렸다. 마침내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요양병원으로 뛰어 들어갔을 때, 진지희는 지하실 입구에 홀로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는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고, 몸의 절반은 이미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몸에는 억제대가 묶여 있었고, 사지는 꽉 조인 탓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늙고 창백한 얼굴에는 본능적으로 흘린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본 진지희는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미친 사람처럼 달려 든 진지희는, 온 힘을 다해서 의료용 침대를 비를 피할 수 있는 안쪽으로 밀어 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체중에 철제 프레임의 무게까지 더해진 의료용 침대는, 고열로 거의 탈진한 진지희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생명 유지 장치도 없이 언제 돌아가실지 몰랐다. 결국 진지희는 유명훈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제발 부탁이야. 나한테 뭘 시키든 다 할게. 그러니까 우리 아빠만은 놔줘!”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허나영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진지희, 네가 예전에 나를 때리고 욕하고, 또 나를 그곳으로 보내 버린 것까지 하나하나 다 갚아 줄 거야. 고작 이 정도도 못 견디겠어? 이제 겨우 시작인데?] 진지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허나영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더니, 날카롭고 귀를 찢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사모님, 저는 그저 오빠를 곤란하게 만들기 싫어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뿐인데, 왜 이렇게 독한 말로 저를 모욕하세요?] [저, 저는 그저 진심으로 오빠를 사랑할 뿐이에요.] 허나영은 눈물까지 흘리며 가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오빠의 그 어떤 것도 탐낸 적 없어요. 사모님 자리나 유씨 집안의 재산을 두고 사모님과 다툴 생각도 전혀 없고요.] 진지희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낌새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유명훈의 음침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진지희, 넌 정말 답이 없구나?] 진지희는 서둘러 해명했다. “아니야. 나는 그냥 우리 아빠를 놔달라고 부탁하려던 것뿐이야.” [됐어!] 수화기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나영이 정도면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런데도 너는 우리 집안 재산 때문에 기어이 걔를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넌 정말 나를 끝까지 실망시키는구나!] 진지희의는 가슴을 두꺼운 솜으로 꽉 틀어막은 것처럼 답답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고, 무슨 말을 더 꺼내는 것조차 변명처럼 들릴 터였다. 유명훈은 이미 진지희에게 대한 편견이 너무 깊숙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진지희가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시 입을 연 유명훈의 목소리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색만 남아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진지희의 심장을 베었다. [네 아빠를 살려 달라고? 좋아. 그럼 요양병원에서 머리 좀 제대로 뜯어고치고 정신 차려.] 진지희의 신경이 순간적으로 곤두서면서 유명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이 요양병원에는 최첨단 전기경련치료 장비가 있었다. 그러니 진지희의 정신을 억지로 차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장비였다. “안 돼. 당신도 알잖아. 나 죽을 거야...” 진지희는 오랫동안 중증 우울증을 앓아 왔다. 전기경련치료는 일반인에게는 그저 고통스러운 치료에 그칠 수도 있지만, 진지희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해, 아버지가 경쟁자의 계략에 걸려들었을 때였다. 함께 붙잡혔던 부녀는 고문용 전기의자에 묶인 채 사흘 밤낮을 고문당했다. 구조됐을 당시 진지희는 자신의 온몸을 미친 듯이 할퀸 상태였다. 열 손가락의 손톱은 모조리 부러져 부러져 있었고, 온몸은 피범벅이 되어서 사람의 모습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 일 이후 진지희는 우울증을 앓게 됐다.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증상이 재발했고, 심각한 신체화증상까지 나타났다. 유명훈이 진지희를 가장 사랑했던 그 시절에는 ‘전기’라는 단어조차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 말만으로도 진지희가 자극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진지희의 갈라진 목소리에는 이 사랑에 대한 마지막 애원이 담겨 있었다. 이제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마음이 약해져 주기를 바라는 마지막 부탁이었다. “제발...” 유명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지희는 두 사람의 지난날을 생각해 주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네가 제대로 교훈을 얻어야 하는 거야!” 진지희의 마음은 순식간에 끝없는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뭐라니?’ 그 한마디는 너무나 명확했다. 이제 유명훈은 허나영을 위해서라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진지희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손에서 놓친 휴대폰이 진흙탕에 떨어졌다. 곧이어 합선이 일어났는지 지직거리며 몇 번 번쩍이더니 화면이 완전히 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양병원 의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 사람들은 진지희를 끌고 가서 전기치료 침대에 묶었고, 여자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저승사자처럼 냉정했다.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사모님이라고 봐드리지 말라고요.” “사모님이 더 심한 고통을 받을수록 아버님이 장치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더 길어져요.” 진지희는 마침내 몸부림치는 것을 포기하고 비참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알고 보니 99번째 내연녀인 허나영은 이미 유명훈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마지막 여자가 되어 있었던 같았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 역시 더는 혼전 계약서를 발견한 뒤 사랑받지 못한 분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전기치료 장비가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진지희는 절망 속에서 눈을 감았다. 강렬한 전류가 온몸을 관통하는 순간, 진지희의 입에서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제4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기억과 현실이 뒤엉키자, 진지희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괴로웠다. 진지희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죽을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억제대는 이미 한계까지 팽팽하게 조여져 있었다. 진지희가 저항할수록 더 피부를 파고들었고, 이내 가로세로로 얽힌 상처가 생겨났다. 피가 전기치료 의자의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몇 사람이 달려들어 진지희를 짓누르며 꼼짝도 하지 못하게 억지로 붙잡았다. 마치 송곳으로 변한 것처럼 전류가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곧장 파고들더니, 순식간에 온몸을 관통했다. 고통을 견디기 위해 진지희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자, 입안 가득 비릿한 쇠 맛이 번졌다. “아악! 아악!” 꼬박 24시간이 지나자, 처절한 비명은 점점 가느다란 숨소리로 변해 갔다. 전기치료로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어 깨우고 또다시 전기치료를 했다. 그렇게 한 차례, 또 한 차례 잔혹한 고통이 반복됐다. 마침내 전기 치료실이 핏빛으로 물들고 나서야 진지희는 아버지의 병실로 내던져졌다. 그런 뒤 휴대폰을 진지희의 얼굴에 내던졌다. 강렬한 통증에 여자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보니,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이미 평소와 같은 상태로 돌아와 있었고, 각종 의료 장비도 다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진지희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리면서 화면에 허나영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누렇게 바랜 일기장 사진이었다. 그 일기장은 진지희의 일기장이었고 아래에는 이런 글이 덧붙어 있었다. [오빠가 이걸 쓰레기인 줄 알고 태울 뻔했는데, 내가 아주 친절하게 남겨 뒀어.] [원래 네가 제일 기대했던 게 오빠랑 남극에 가서 오로라를 보는 거였구나? 정말 공교롭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맞혀 볼래?] 그러고는 수십 장의 사진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진 속에는 하나같이 유명훈과 허나영이 오로라 아래에서 서로 기댄 채 다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유명훈은 심지어 소행성 하나를 사서 ‘유애나’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유명훈이 허나영을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한때 진지희가 일기장에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갔던 소망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로라를 보는 것,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소행성 하나의 이름을 짓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은 허나영의 것이 되어 버렸다. 진지희는 무감각하게 휴대폰 화면을 꺼 버리고 아버지를 돌보는 데만 집중했다. 유명훈이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진지희는 해외의 한 요양병원과 연락한 뒤 온라인으로 인수 절차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허나영이 보내오는 자랑 섞인 메시지는 끊임없이 계속 들어왔다. 남극을 떠난 뒤, 두 사람은 차례로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 칠레의 이스터섬, 리우의 예수상까지 찾아갔다. 일기장에 적혀 있던 그 모든 소망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이 한 곳에 도착할 때마다, 진지희는 자신과 유명훈 사이의 추억을 조금씩 태웠다. 협의이혼 서류를 받아 든 날, 진지희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사진 한 무더기를 모조리 태웠다. 눈앞의 화로에서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뭐 하는 짓이야?” 유명훈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뛰어 들어오더니 진지희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이제는 더는 연기하기가 힘들어? 돈을 벌 수 없게 되니까 이런 것들까지 눈에 거슬리는 거야?” 진지희는 그대로 튕겨 나가듯 쓰러졌다. 등이 대리석 기둥에 거세게 부딪히며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그 바람에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지면서, 입안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진지희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이런 걸 남겨 두면, 허나영이 보고 눈엣가시처럼 여길 수도 있는데 그건 겁 안 나?” 말을 마친 진지희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비틀거리면서 그곳을 떠나려고 했다. 멍하니 진지희를 한참 바라보던 유명훈은 문득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진지희가 야위었다는 걸 깨달았다. 몸에 걸친 헐렁한 옷은 진지희가 움직일 때마다 옷자락이 힘없이 흔들렸다. 마치 살짝만 건드려도 그대로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이윽고 유명훈의 심장이 갑자기 꽉 조여들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유명훈은 빠르게 진지희를 따라가 허리를 감싸안았다. “진지희! 내가 졌어. 그러니까 그만하면 안 돼?” 좀처럼 보여 주지 않던 부드러운 태도에 진지희는 온몸이 굳어 버렸다. 심장이 거칠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리면서 유명훈의 뒷말을 끊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허나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누가 나를 따라오고 있어. 나 너무 무서워. 빨리 와서 구해 줘...] 유명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진지희를 놓은 뒤 곧바로 돌아섰다. “나영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금방 갈게!” 마당이 다시 텅 비고 나서도 진지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몸에는 아직 유명훈의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한참 뒤, 진지희는 낮게 웃음을 흘리고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세게 후려쳤다. 짝 하는 맑고 선명한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진지희, 진짜 꼴좋네. 어떻게 또 마음이 약해질 수 있었지?” ‘괜찮아. 어차피 이틀만 지나면 아버지를 데리고 완전히 떠날 테니까.’ 그렇게 다짐한 진지희는 그날도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막 어렴풋이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에게 거칠게 잡아당기면서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아이스 커피가 얼굴에 그대로 끼얹어지자, 눈가가 따끔거리면서 아팠다. 이윽고 유명훈의 모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에 끼얹은 차가운 커피처럼 차갑고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 “너 사람을 시켜서 감히 나영이를 납치하게 해?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잊었어?” 제5화 진지희의 머릿속은 온통 멍했다. “나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런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나영이 뛰쳐나오더니, 진지희를 가리키며 목이 쉬도록 몰아세웠다. “사모님, 저도 참을 만큼 참았어요. 왜 몇 번이고 저를 망가뜨리지 못해 안달이세요!” 말을 마치고 옷섶을 풀어 헤치면서, 쇄골 주변에 크게 번진 시퍼런 멍과 수상한 붉은 자국을 드러냈다. “이게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오빠가 제때 오지 않았으면 저는 완전히 끝장났어요...” 유명훈은 그 자국들을 보자 안색이 더욱 험해졌다. “진지희, 네가 감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말했잖아. 또 나영이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려?” 진지희는 죽을힘을 다해 해명했다. “내가 한 거 아니야! 당신이 조사해 봐도 돼. 진짜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아직도 발뺌하는 거야?” 유명훈이 눈가를 붉히며 진지희의 목을 움켜쥐었다. “진지희, 나는 정말 네가 이제 신경 안 쓰는 줄 알고, 그 물건들을 태운 줄 알았어. 알고 보니 내 경계심을 풀어 놓고 나영이를 노리려던 거였구나?” “잊었어? 네가 가진 모든 건 다 내가 준 거야. 내가 돈을 주는 건 나한테 맞서라고 준 게 아니라고!” “밖에 누구 없어요? 지희를 지하 업소로 보내세요. 돈줄한테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 하는지 제대로 가르쳐 주라고 하고요!” 그 말을 들은 진지희의 귓가에서 순식간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목구멍이 시멘트로 꽉 막힌 듯 숨조차 멎었다. 온몸을 떨던 진지희는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 진짜 나를 그런 데로 보내겠다고?” 유명훈은 음침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영이를 다치게 한 순간부터 값을 치러야 한다는 걸 알았어야지!” 그 말에 진지희는 가슴이 칼로 저미는 듯 아팠다. 지하 업소는 소문이 자자한 인간 지옥이었다. 들어간 여자는 열에 아홉이 죽거나 미쳐 나왔고, 멀쩡한 몸으로 걸어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유명훈이 정말로 허나영을 위해 이런 짓까지 하려는 것이었다. 진지희의 핏발이 가득 선 눈으로 유명훈을 노려보더니, 온 힘을 다해서 남자를 밀쳐 냈다. 그리고 곧장 탁자로 달려가 접시에 놓인 과도를 집어 자신의 목에 겨누고, 한 글자 한 글자 울분을 토해내듯 말했다. “나를 거기로 보낼 거면 차라리 지금 여기서 죽여.” 그 말에 유명훈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면서 온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눈에는 극도의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했고,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지 마! 지희야, 성급하게 굴지 마. 우리 얘기로 잘...” 허나영은 유명훈이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을 보자, 눈에 서린 독기가 더욱 짙어졌다. 이를 악문 허나영이 울부짖으며 베란다로 뛰어가서 유명훈의 말을 끊었다. “됐어. 내가 천해서 그래. 어떻게 사모님이나 되시는 분이 나 때문에 끌려가실 수 있겠어?” “오빠, 저 여자는 연기하는 것뿐인데 그걸 또 믿는 거야? 이렇게까지 모욕당한 나야말로 정말 더는 살 수 없다고!” 말이 떨어지자 허나영은 난간을 넘어 2층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쿵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허나영은 뒷마당의 수풀에 무겁게 떨어졌다. “나영아!” 유명훈은 온몸이 굳은 채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포효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비틀거리며 뛰쳐나갔다. 진지희 또한 여전히 충격에 잠겨 있었다.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자 손에 든 과도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뒤를 따라 나갔다. 허나영은 온통 피바다 속에 늘어져 있었다. 층이 높지 않았고 수풀이 충격을 덜어주어서 다치기는 했어도 의식은 또렷했다. 허나영은 서럽게 유명훈의 품에 기대어 눈물 콧물을 쏟았다. “오빠... 나는 신경 쓰지 마. 그냥 죽게 놔둬...” 유명훈은 안타까운 마음에 허나영을 꽉 끌어안았다. 안색은 타버린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진지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네 억울함을 풀어 줄게!” “조금만 더 버텨. 구급차가 곧 와.” 허나영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유명훈의 어깨 너머로 멀지 않은 곳의 진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서서히 음침한 웃음이 떠올랐다. 눈빛에는 득의양양한 조롱이 가득했고 소리 없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진지희, 너는 끝났어.’ 구급차가 도착하자 유명훈은 허나영을 안아 들었다. 떠나기 전 진지희를 노려보는 눈에는 이제 온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들 뭘 멍하니 있죠? 지희를 지하 업소로 보내서 벌을 받게 하세요!” 경호원들이 곧바로 다가오더니, 멍하니 있던 진지희를 바닥에 사정없이 눌렀다. 진지희의 뺨이 뾰족한 돌멩이에 눌리며 순식간에 피가 났다. 살을 파고드는 통증이었다. 위에서 진지희를 내려다보던 유명훈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3시간 뒤에 사람을 시켜 꺼내 줄게. 이번 교훈 잘 새겨 두고, 다시는 선 넘지 마!” 말을 마친 유명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경호원들은 진지희를 끌어 일으켜서 거칠게 지하 업소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냉혹한 소굴에 진희를 내던졌다. 문이 닫히는 순간 주변의 조명이 일제히 켜지더니, 채찍을 손에 쥔 열댓 명의 남자가 천천히 진지희에게 다가왔다. 제6화 짝하는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채찍은 곧바로 진지희의 등을 후려치자, 살이 처참하게 터지며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입은 걸레 조각으로 틀어막혀 있어서 고통스러운 신음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고통을 쏟아낼 곳이 없으니 오히려 온몸으로 더욱 아프게 퍼져 나갔다. 그 고통을 미처 견뎌 내기도 전에 채찍이 다시 내리쳤다. 짝! 짝! 짝! 한 번, 또 한 번, 닫힌 방 안에서 채찍 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졌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서 진지희는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갈라진 목소리를 겨우 짜냈다. “나한테 이러면 안 돼!” 그러나 아무도 진지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피와 오물은이 바닥에 번져 갔고, 업소 특유의 냄새까지 뒤섞여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끝없는 구타 속에서 진지희의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하지만 정신을 잃을 때마다 누군가가 고농도의 술을 끼얹어서 진지희를 다시 깨웠다. 진지희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꼬박 999대였다. 진지희는 한 대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세었다. 절망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그 사람들이 마침내 손을 멈추고는 달팽이처럼 웅크린 진지희를 농락하듯 발로 툭툭 차며 웃음을 터뜨렸다. “유 대표님 말이 정말 맞네요.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고생이든 다 하는 걸 보면요!” “그러니까 사모님, 앞으로는 정신 좀 차리고 얌전히 계세요. 뭐든 시키는 대로 잘 따르시고요!” 그 말들에 진지희는 소리 없이 눈을 감았다. 이제 이 고통도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대문이 다시 열렸다. 험악한 인상의 중년 여자 몇 명이 줄지어 들어와 진지희를 빙 둘러쌌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일부러 일을 벌이고 그딴 식으로 성질을 부리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제대로 알려 드리라고요.” “그럼 실례 좀 할게요.” 험상궂은 중년 여자들은 진지희를 다리미로 지지고, 굵은 바늘로 찌르고,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여자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손가락을 있는 힘껏 바닥에 박아 넣는 바람에 손톱 몇 개가 그대로 뒤집히면서 벗겨졌다. 절망에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의 3칸을 지나간 것으로 보아 3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진지희를 풀어주러 오지 않았다. 진지희는 자조하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면서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아직도 유명훈의 말을 믿고 있었지?’ 하늘이 뿌옇게 밝아 오고, 고농도 알코올을 끼얹어도 더는 진지희를 깨울 수 없게 된 뒤에야 이 끔찍한 고문이 마침내 끝났다. 진지희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옆에서 간호사 둘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었어요? 유 대표가 허나영 씨를 살리려고 식물인간인 장인을 데려왔대요!” “들었어요. 장인어른이 마침 O형인데, 허나영 씨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병원에도 혈액이 부족했다나 봐요.” 그 말에 진지희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간호사들의 말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들려왔다. 진지희는 너덜너덜해진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간호사가 말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꽂힌 주삿바늘을 뽑은 뒤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나영의 병실을 찾아갔을 때, 마침 유명훈이 병실 문 밖에서 의사에게 채혈을 지시하고 있었다. 진지희는 그대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유명훈의 다리를 죽을힘을 다해 끌어안았고 쉰 목소리는 처절하게 갈라졌다. “제발, 유명훈. 이러지 마. 우리 아빠는 이미 식물인간이야. 신체 기능이 거의 멈춘 상태라서 수혈하면 죽을 수도 있어!” “제발 우리 아빠를 놔줘! 나한테 남은 가족은 아빠 하나뿐이야!” 유명훈이 눈을 내리깔고 진지희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온몸에 난 흉측한 상처에 닿자, 순간 눈빛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그러나 진지희가 내뱉은 자신에게 남은 가족은 이제 아빠 하나뿐이라는 말에 유명훈의 표정은 다시 차갑게 굳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억누르기 힘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곧 유명훈은 냉담하게 시선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영이가 대량 출혈이 난 건 전부 네 탓이야. 그러니 장인어른이 나영이를 살리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러고는 손을 들어 경호원을 부르자, 경호원들이 달려와 진지희를 억지로 떼어 냈다. 유명훈은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명령했다. “수혈 시작하세요!” “안 돼!” 진지희는 울음을 터뜨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채 바닥에 무릎 꿇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존엄도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절망과 고통, 걱정과 무너지는 멘탈, 수많은 감정이 뒤엉켜 가슴속에 겹겹이 쌓였다. 진지희는 갑자기 각혈을 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진지희는 이미 병실로 돌아와 있었다. 막 몸을 일으켜 아버지를 찾아가려고 하는데 의사가 진지희를 가로막았다. “마음 잘 추스르세요, 진지희 씨. 아버님께서 장기 부전으로 돌아가셨어요.” “식물인간으로 오랫동안 지내셨는데 이만큼 살아오신 것만 해도 기적이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진지희는 벼락을 맞은 듯 굳어 버렸다.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죽을힘을 다해 움켜쥐었다. 말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입을 크게 벌렸지만 소리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한 눈물조차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았다. 사람이 정말 극한의 고통에 이르면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진지희는 의사를 밀쳐 내고 맨발로 걸어갔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처럼, 그대로 안치실까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버지의 몸을 덮고 있던 흰 천을 걷어 올린 순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진지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목 놓아 울었다. “아빠! 죄송해요! 내가 사람을 잘못 사랑해서 아빠를 돌아가시게 만들었어요!” 이틀 뒤, 진지희는 퇴원했고 혼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법원에 가서 이혼을 증명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 후 바닷가로 향했다.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듯 그대로 바다에 몸을 던졌고, 진지희는 그렇게 끝없이 펼쳐진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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