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하는 이혼

GoodNovel 완결

구도현과 결혼한 지 8년. 매년 결혼기념일만 되면 구도현은 항공사에서 갑자기 비행 스케줄이 잡혔다며 집을 비웠고 돌아올 때면 값비싼 귀걸이를 선물하며 내 마음을 달래고는 했다. 그런데 올해 결혼기념일, 나는 우연히 구도현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됐다. “도현아, 너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윤채희랑 같이 있잖아. 네 아내는 아직도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애가 생길 리가 있나. 집에 가서 남겨 주는 게 얼마나 된다고.” 구도현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채희는 나 하나 믿고 모든 걸 버리고 왔어.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고 가정을 만들어 줘야지.” “내 아내는... 유산한 뒤로 마음이 완전히 식었어. 때가 되면 이혼하자고 할 거야. 불공평하긴 하겠지만 돈으로 충분히 보상해 주면 되겠지.” 하지만 구도현에게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몰랐다. 바로 그 결혼기념일, 나는 난소암 말기 진단을 받았으니까. 구도현이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도 더는 그 사람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구도현, 이제 우리 서로 놓아주자. 앞으로는 다시 만나지 말자.’

챕터 (1)

第1章

구도현과 결혼한 지 8년. 매년 결혼기념일만 되면 구도현은 항공사에서 갑자기 비행 스케줄이 잡혔다며 집을 비웠고 돌아올 때면 값비싼 귀걸이를 선물하며 내 마음을 달래고는 했다. 그런데 올해 결혼기념일, 나는 우연히 구도현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됐다. “도현아, 너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윤채희랑 같이 있잖아. 네 아내는 아직도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애가 생길 리가 있나. 집에 가서 남겨 주는 게 얼마나 된다고.” 구도현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채희는 나 하나 믿고 모든 걸 버리고 왔어.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고 가정을 만들어 줘야지.” “내 아내는... 유산한 뒤로 마음이 완전히 식었어. 때가 되면 이혼하자고 할 거야. 불공평하긴 하겠지만 돈으로 충분히 보상해 주면 되겠지.” 하지만 구도현에게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몰랐다. 바로 그 결혼기념일, 나는 난소암 말기 진단을 받았으니까. 구도현이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도 더는 그 사람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구도현, 이제 우리 서로 놓아주자. 앞으로는 다시 만나지 말자.’ 제1화 마지막 요리를 완성해 식탁으로 향하자 구도현과 친구들이 나누던 대화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그중 한 명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에 들린 접시를 받아 갔다. 하지만 나머지는 하나같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입으로는 결혼기념일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전혀 진심처럼 들리지 않았다. 구도현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되찾았고 얼굴 어디에서도 당황하거나 찔리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전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태연했다. “힘들었지? 얼른 앉아서 밥 먹자.”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 둔 검사 결과지를 꺼내지 못했다. 구도현은 다정한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자를 빼 주더니 가방에서 결혼기념일 선물을 꺼냈다. 이번에도 별다른 것이 없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귀걸이였다. 벌써 아홉 번째였다. 나는 구도현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서윤아, 두 시간 뒤에 비행 임무가 하나 잡혔어. 오늘은 같이 못 있을 것 같아.” 구도현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똑같은 약속을 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이번 비행만 끝내고 나면 제대로 시간 낼게. 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친구들이 거들었다. “형수님, 도현이 형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도 다 형수님을 편하게 살게 해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안 그랬으면 저렇게 비싼 귀걸이를 어떻게 사 주겠어요.” “도현이 형이 형수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검사 결과지를 움켜쥔 나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결국 나는 힘없이 손을 풀었고 울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기념일이 뭐 별거 아니잖아. 일이 더 중요하지.” 내가 쉽게 받아들이자 구도현의 미간에 남아 있던 근심도 금세 사라졌다. 구도현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품에 끌어안고 턱을 들어 올린 뒤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난 정말 복이 많네. 이렇게 이해심이 많은 아내를 다 얻다니... 얌전히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늘어뜨린 손을 꽉 쥐었다. “이번 비행 임무는 꼭 당신이 가야 해? 오늘만이라도 같이 있으면 안 돼? 기념일이 지나기 전에 할 말이 있어.” 구도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순간 굳었다. 그래도 구도현은 애써 다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나랑 떨어지기 싫은 건 알겠는데 이번 임무는 정말 빠질 수가 없어. 내 말 잘 듣고 오늘은 친구들이랑 같이 밥 먹고 있어. 내가 나중에 꼭 보상할게.” 구도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구도현은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서둘러 외투를 챙겨 입으며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할 말은 내가 다녀와서 나중에 하자.” 대충 한마디를 남긴 구도현은 그대로 돌아서 나갔고 곧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구도현이 나가자 집 안은 순식간에 다시 시끄러워졌고 웃음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친구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내 잔에 주스를 따라 주었다. “형수님,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그래도 저희가 있잖아요. 도현이 형도 저희한테 형수님이랑 밥 잘 먹으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괜히 화내고 그러시면 안 돼요.” 가식으로 가득한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는 오히려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술이 들어갈수록 목소리는 커졌고 말에는 점점 거리낌이 없어졌다. 나중에는 내가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 “와, 내가 한서윤이면 진짜 살기 싫겠어.” “도현이 형이 윤채희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데. 요즘 둘이 애 가지려고 준비한다던데?” “한서윤 그 멍청한 여자는 자기한테 문제가 있어서 애가 안 생기는 줄 알잖아.” “야, 입 좀 다물어. 근데 도현이 형이 보내 준 사진이랑 영상 봤냐? 윤채희 몸매가 장난 아니던데?” “떨어져 있으면 더 애틋해지는 거 몰라? 어차피 도현이 형은 곧 이혼하고 새 인생 시작할 건데 이제 와서 뭘 신경 써?”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파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지만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2화 깊은 밤이 되자 조금 전에 거실에서 떠들던 소리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침대에 웅크려 앉아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협탁 위에 놓인 구도현과의 사진을 집어 들고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보았다. 사진 속 그때의 행복이라도 다시 느껴 보고 싶었지만 이내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구도현은 진작부터 자신의 SNS를 내게 보이지 않도록 막아 두었다. 그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을 나누는 상대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나한테 들키게 둘 수 있겠는가. 나는 구도현이 나의 순진한 모습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구도현이 좋아했던 건 내가 아니라 자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나의 믿음이었다. 무려 9년 동안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구도현의 태블릿에 시선이 갔다. 잠금번호에 윤채희의 생일을 입력하자 너무도 쉽게 화면이 열렸다. 구도현의 SNS를 하나씩 확인할수록 나는 심장에 날카로운 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구도현은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일을 핑계로 나를 두고 윤채희를 만나러 갔다. SNS 계정의 배경도 온통 구도현과 윤채희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안에서 나와 관련된 것이라고는 예전에 아이를 잃었을 때 받은 검사 결과지뿐이었다. 게시물마다 두 사람을 축복하는 댓글이 가득했지만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구도현은 단호하게 답을 남겼다. [결혼이 사람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난 그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을 뿐이야.] 그 순간 눈물이 화면 위로 뚝뚝 떨어지며 시야까지 흐려졌고 손발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나는 결국 태블릿을 꺼 버렸지만 머리가 저릴 만큼 가슴이 아픈 건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앞치마 안에 넣어 두었던 검사 결과지를 꺼냈다. 몇 번이나 접었다 펴서 구겨진 종이였다. 잔인한 진단 결과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터졌다. 한참 뒤 겨우 감정을 추스른 나는 변호사이자 유일한 친구인 서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진아, 구도현이 바람피우고 있었어... 내가 모은 증거를 전부 보낼게. 이혼할 거야. 협의가 안 되면 소송까지 갈 생각이야.” “구도현 씨가 바람을 피웠다고?” 서유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구도현과 결혼한 뒤 나는 집안일에만 매달리며 바깥세상과 거의 단절된 채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곁에 남은 친구라고는 서유진 하나뿐이었다. 그런 내가 오랜만에 연락해 꺼낸 이야기가 남편의 불륜과 이혼이라니 서유진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응.” 구도현 하나만 바라보고 살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포기했다. 서유진은 곧바로 내 이혼을 맡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구도현의 SNS에서 발견한 것들을 빠짐없이 사진으로 남겨 증거를 확보한 뒤, 따로 집을 구해 집을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집 안에 있는 내 물건을 하나씩 정리했다. 구도현은 늘 일이 바빴고 외박도 흔했다. 그래서인지 9년을 함께 살았는데도 우리 둘 사이를 이어 주는 물건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장식장에 놓인 아홉 쌍의 귀걸이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그 아홉 쌍의 귀걸이가 가진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구도현은 바람을 피울 때마다 내게 귀걸이 한 쌍씩을 선물했다. 그렇게 모인 아홉 쌍의 귀걸이는 구도현이 9년 동안 나를 배신했다는 증거였다. 장식장 앞에 서 있자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구도현과 윤채희가 예전에 사귀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결혼까지 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 더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믿었다. 애초에 구도현을 먼저 버린 사람도 윤채희였다. 처음 만났을 당시 구도현은 이별의 상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나타난 덕분에 구도현이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구도현에게 더 잘해 주고 싶었다. 구도현의 사랑이 다시 살아난 건 맞았지만 그 대상이 내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책장 한쪽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에는 번호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비밀번호 역시 윤채희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안에는 구도현이 직접 쓴 글이 들어 있었다. [한서윤과 이혼하기로 했다. 다만 한 달 동안 생각해 볼 생각이다. 그 안에 마음이 바뀌면 이혼 서류는 없애 버리겠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윤채희야. 채희는 나 없이는 안 돼.] 반듯하고 힘 있는 구도현이 쓴 글씨가 종이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구도현은 이토록 윤채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원해도 한 번도 해 주지 않았던 일들을 윤채희에게는 기꺼이 해 주면서 단 한 번도 그녀를 잊은 적 없이 조용히 사랑해 온 것이다. 책장 맨 아래 서랍을 열자 가장 깊숙한 곳에서 이혼 합의서 한 부가 나왔다. 구도현의 서명은 이미 끝나 있었다. 마치 하루라도 빨리 나와 이혼하고 싶었던 것처럼 서명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더는 버틸 힘조차 남지 않았다. 난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고 그날 밤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꼬박 새웠다. 그리고 천천히 날이 밝아올 무렵, 나는 구도현이 바라던 대로 이혼 합의서에 내 이름을 적었다. 제3화 나는 이혼 합의서를 거실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구도현이 보면 분명 좋아하겠지.’ 9년을 살아온 집을 정말 떠나려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그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메시지였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고 가는 내내 구도현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혼 합의서를 발견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병원에 들어섰는데, 고개를 드는 순간 그토록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구도현이었다. 구도현은 산부인과 앞에 서 있었고 곁에는 윤채희가 있었다. 윤채희는 구도현의 품에 안겨 있었고 구도현은 다정한 얼굴로 윤채희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누가 봐도 둘은 다정한 부부 같았다. 내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렀던 걸까. 구도현도 곧 나를 발견했고 흠칫 놀라면서 윤채희를 안고 있던 팔을 황급히 거두더니 어색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서윤아, 네가 왜 여기 있어?” 구도현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옆에 선 윤채희에게 계속 눈짓을 보냈다. “비행 임무가 끝나고 방금 돌아왔어. 채희가 몸이 좀 안 좋다는데 우연히 마주쳐서 검사받는 것만 같이 와 준 거야.” 구도현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너도 알잖아. 나랑 채희는 그냥 친구야. 채희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도 없는데 모른 척할 순 없잖아.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막힘없이 쏟아지는 변명은 늘 그럴듯했다. 이 정도만 둘러대면 내가 당연히 속아 넘어갈 거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예전의 나라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조용히 넘어가자 오히려 구도현이 당황한 눈치였다. 구도현은 입을 벌렸다가 몇 번이나 말을 삼켰다. 그동안 잠자코 있던 윤채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고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현이랑 저는 정말 친한 친구 사이예요. 서윤 씨, 설마 신경 쓰이는 건 아니죠? 괜히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부탁해서 도현이가 같이 와 준 거예요.” 윤채희가 말하는 동안 구도현의 시선은 줄곧 윤채희에게 머물러 있었다. 구도현의 눈빛에는 애정이 너무도 선명했다. 구도현이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본 게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목 안이 바짝 마른 나는 잠긴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알아요. 둘이 그냥 친구인 거요.” 내가 너무 무심하게 대답해서였을까. 표정이 금세 굳은 구도현은 갑자기 나를 거칠게 밀어내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윤아, 그런데 넌 왜 병원에 있는 건데?”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한서윤, 너 설마 날 따라온 거야? 겨우 결혼기념일 하나 때문에 나를 미행한 거야?” 나는 정말 기가 막혔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오히려 나를 몰아세우다니...’ “그럴 만큼 한가하지 않아. 혼자 착각하지 마.” 내가 차갑게 대답하자 구도현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평소의 나는 늘 구도현에게 다정했고 먼저 맞춰 주는 편이었기에 갑자기 달라진 내 태도가 더 못마땅한 듯했다. 결국 구도현은 쌓여 있던 화를 한꺼번에 쏟아내듯 목소리를 높였다. “한서윤, 적당히 해.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는 손에 든 검사 결과지를 내려다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실망할 만큼 실망해서 이제는 화를 낼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구도현의 마음은 진작 윤채희에게 가 있었으니 그런 사람이 내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신경이나 쓸 리 없었다. 제4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구도현은 미간을 찌푸렸고 한숨을 내쉰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났어?” 그래도 눈치는 있는 편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아니, 그냥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지자 윤채희는 눈치를 살피더니 일부러 힘없는 척 구도현의 품으로 기대었다. “미안해. 도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부탁하지 말 걸 그랬어. 나 때문에 서윤 씨가 기분이 상했잖아. 다 내 잘못이야.” 구도현은 망설임도 없이 윤채희를 끌어안았고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네가 뭘 잘못했겠어. 신경 쓰지 마. 우리 사이에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있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잖아.”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맞추며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 나는 시선을 돌리고 두 사람을 지나쳐 가려 했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구도현이 내 팔을 붙잡았다. “서윤아, 시간 나면 내가 해외여행 데려가 줄게. 결혼기념일도 제대로 못 보내서 네가 서운한 거 알아.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너한테 한 약속은 꼭 지킬게.” 팔을 붙잡힌 탓에 걸음을 멈추고 구도현을 바라봤지만 구도현은 곧바로 윤채희의 어깨를 감싸안고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미 상처 입을 만큼 입은 내 마음은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았고 그런 모습을 보고도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 나는 구도현이 원하던 대로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제 앞으로 구도현이 있는 곳에 내가 나타날 일도 없을 것이다. 검사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난소암은 치료가 가능한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말기까지 진행된 상태라 약으로 버티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남은 시간도 많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살아야겠다는 마음마저 희미해졌다.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나를 모든 것에서 놓아주는 마지막 해방일지도 몰랐다. ‘구도현... 이제야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겠네.’ ... 병원을 나온 뒤 2주가 지났지만 구도현은 내가 집을 떠났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아마 윤채희에게 푹 빠져 정신없이 지내고 있었겠지.’ 구도현과 나눈 문자는 2주 전을 마지막으로 끊겨 있었다. [요즘 비행이 많아서 당분간 집에 못 들어가.] 그러다 오늘에서야 구도현에게 새 메시지가 왔다. [서윤아, 요 몇 주 계속 근무했는데 며칠은 다른 사람이 대신 비행해 주기로 했어. 이제 곧 집에 가서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어.] [요즘 왜 이렇게 차가워? 남편한테 먼저 연락도 안 하고 말이야. 난 계속 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가끔가다 한 번씩 삐지는 거라고 생각할게.] 문자를 다 읽자 나는 짜증이 밀려와 휴대폰을 꺼 버렸다. 새벽이 될 때까지 내가 답하지 않자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나 쌓였다. 구도현의 번호를 차단하자 이번에는 다른 번호를 바꿔 가며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무래도 거실 테이블 위에 두고 온 이혼 합의서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메시지를 열어 보니 문장 하나하나에서 구도현의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느껴졌다. 구도현은 화가 나면서도 불안한 듯 연달아 메시지가 날아왔다. [한서윤, 너 어디 간 거야?] [누가 마음대로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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