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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들의 장례식
남편의 첫사랑을 위한 인간 혈액고 취급을 받으며 피를 뽑히던 나는 최고 재벌인 남편이 적선하듯 내어준 셋방에서 쓸쓸히 병들어 죽었다. 내가 숨을 거둔 지 사흘째 되던 날, 여섯 살배기 아들은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장난감을 만지다 손을 베여도 나는 보듬어주지 않았고 과자를 뜯어내 입에 억지로 넣어주어도 말리지 않았으니까. 내 품에 파고들어 옷자락을 쥐어 잡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엄마를 불러대도 나는 묵묵부답이었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아이는 마침내 내 휴대폰을 찾아내어 최고 재벌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엄마가 왜 안 일어나고 계속 자요.” 남자는 첫사랑과 함께 성대한 연말 파티를 즐기는 사진 한 장을 툭 던지듯 보내며 매몰차게 대꾸했다. “그냥 잠든 거 가지고 왜 이래? 설마 죽기라도 했대? 오늘 섣달그믐이라 바쁘니까 끊어. 네 그 구제 불능인 엄마한테 전해. 언제든 제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 꿇을 마음이 생기면 그때 날 찾아오라고.” 뚝 끊겨버린 전화 앞에서 아들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쓰레기통을 뒤져 집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자 한 조각을 찾아내더니, 반으로 쪼개어 내 싸늘한 입술에 조심스레 갖다 대었다. “엄마, 우리도 밥 먹어요.”
챕터 (1)
第1章
남편의 첫사랑을 위한 인간 혈액고 취급을 받으며 피를 뽑히던 나는 최고 재벌인 남편이 적선하듯 내어준 셋방에서 쓸쓸히 병들어 죽었다.
내가 숨을 거둔 지 사흘째 되던 날, 여섯 살배기 아들은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장난감을 만지다 손을 베여도 나는 보듬어주지 않았고 과자를 뜯어내 입에 억지로 넣어주어도 말리지 않았으니까.
내 품에 파고들어 옷자락을 쥐어 잡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엄마를 불러대도 나는 묵묵부답이었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아이는 마침내 내 휴대폰을 찾아내어 최고 재벌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엄마가 왜 안 일어나고 계속 자요.”
남자는 첫사랑과 함께 성대한 연말 파티를 즐기는 사진 한 장을 툭 던지듯 보내며 매몰차게 대꾸했다.
“그냥 잠든 거 가지고 왜 이래? 설마 죽기라도 했대? 오늘 섣달그믐이라 바쁘니까 끊어. 네 그 구제 불능인 엄마한테 전해. 언제든 제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 꿇을 마음이 생기면 그때 날 찾아오라고.”
뚝 끊겨버린 전화 앞에서 아들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쓰레기통을 뒤져 집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자 한 조각을 찾아내더니, 반으로 쪼개어 내 싸늘한 입술에 조심스레 갖다 대었다.
“엄마, 우리도 밥 먹어요.”
제1화
침대에 누운 사람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지만, 아들은 이미 익숙해진 듯했다.
녀석은 조심스럽게 과자를 머리맡에 내려놓고 나서야 제 몫의 절반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하지만 배를 문질러 보아도 여전히 배가 고팠는지 무의식적으로 아무도 먹지 않은 그 과자를 힐끔 보더니, 익숙하게 주방으로 걸어가 컵에 찬물을 한가득 받아 들이켰다.
허공에 둥둥 뜬 내 영혼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밥이 조금만 늦어도 배고프다고 징징거리던 우리 솔찬이가 맞나? 내가 죽은 지 겨우 사흘 만에 어떻게 이렇게 변해버린 거지?’
그때, 휴대폰 화면이 문득 밝아지며 배경화면으로 해둔 단란한 가족사진이 드러났다.
아늑한 방 안에서 한성균이 아직 잠이 덜 깬 나와 아들을 끌어안고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쏙 빼닮은 두 얼굴에는 티 없이 해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날도 나는 자고 있었고 한성균은 아들과 함께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었다.
“솔찬아, 엄마 또 늦잠 자네. 우리 같이 엄마 깨워볼까?”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꾸러기 고양이처럼 웃어 보였다.
“좋아요, 아빠.”
한성균은 눈썹을 쓱 치켜올리더니 등 뒤에서 예쁜 깃털 펜을 꺼내 내 코끝을 살살 간지럽혔다.
한 번, 두 번. 살랑거리는 촉감을 견디다 못한 내가 결국 에취 하고 재채기를 터뜨릴 때까지 말이다.
나는 화가 난 척 몸을 일으켜 베개를 집어 들고는 그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한성균!”
남자는 다급한 척 아들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방패막이로 삼을 요량이었다.
“솔찬아, 빨리 아빠 좀 살려줘.”
방 안에는 이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화면 속 따뜻한 풍경에 어떤 기억이라도 떠오른 걸까. 녀석은 영상 속 깃털을 보며 반색하더니 이내 눈을 반짝였다.
“아빠는 옛날에 이런 식으로 엄마를 깨우곤 했나?”
아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침대 쪽으로 쿵쿵 달려갔다.
“엄마, 솔찬이가 엄마를 어떻게 깨워야 할지 알았어요. 솔찬이가 예전 우리 집에 가서 그 깃털 가져올게요.”
비장한 표정으로 밖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아들을 보며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바닥에 놓인 신발을 집어 신겨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손은 허공을 가를 뿐,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맞다, 깜빡하고 있었다.
난 이미 죽었고 더 이상 우리 솔찬이를 돌봐줄 수 없다는 사실을.
집을 나온 나는 아들을 따라 한씨 저택으로 향했다.
오늘은 섣달그믐이라 거리에는 명절을 앞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하지만 온 가족이 모여 웃고 떠드는 그 왁자지껄한 온기는 도리어 내 마음을 서늘하게 할 만큼 낯설고 아프게 다가왔다.
화려한 한씨 저택 마당에서는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여섯 살배기 여자아이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조심해, 넘어질라.”
서지윤은 곁에서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참으로 화목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아들은 울타리 너머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눈을 뻐끔거렸다. 어딘가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예전에는 한성균도 섣달그믐 밤이면 늘 저렇게 함께 눈싸움을 하며 놀아주곤 했으니까.
아들은 손등으로 눈물을 슬쩍 훔치고는 까치발을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한성균이 아닌 서지윤이었다.
“네가 웬일이야?”
아들을 본 여자의 얼굴에 떠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굳어지며 짙은 경계심으로 바뀌었다.
제2화
서지윤은 고개를 돌려 저편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놀고 있는 한성균을 힐끔 살피고는, 팽팽하게 긴장했던 어깨를 슬며시 내리며 안도했다.
그리고 다시 아이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오직 짙은 짜증과 혐오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네 그 뻔뻔한 엄마가 시켜서 왔니? 여긴 더 이상 네 집 아니라고 얘기 안 하든? 당장 꺼져, 이 근본 없는 놈아.”
아들은 그녀의 노골적인 악의에 놀라 금세 눈물이 핑 돌았다.
“거짓말! 우리 엄마는 뻔뻔한 사람 아니에요! 나쁜 아줌마, 아빠 보여줘요!”
아들은 씩씩거리며 온 힘을 다해 서지윤을 노려보았다.
서지윤은 코웃음을 치더니,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아이를 억세게 밀쳐버렸다.
무방비하게 밀려난 아들의 이마가 철문에 강하게 부딪히며 쿵 하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거기 누구야?”
들려온 소리에 한성균이 반응했다.
서지윤은 화들짝 놀라 아들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으며 다급히 둘러댔다.
“아니야, 그냥 길고양이가 지나갔어. 날 추우니까 하율이 데리고 먼저 들어가.”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서지윤은 살기 어린 눈빛을 내뿜으며 아들의 몸을 사정없이 꼬집어댔다.
“천박한 게 제 엄마랑 똑같아서 하여간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아들이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이마에서 흐른 붉은 피가 눈물과 뒤섞여 뺨을 붉게 물들였다.
“퉤!”
서지윤은 질색하며 아들에게 침을 뱉고는 눈밭으로 내동댕이쳤다.
“진짜 재수 없으려니까.”
눈밭에 팽개쳐진 아들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면서도 악에 받쳐 소리쳤다.
“천박한 건 아줌마잖아요! 나쁜 아줌마! 아빠 만나게 해줘요, 나 아빠 볼 거란 말이에요!”
서지윤은 코웃음을 치며 10센티 굽의 붉은 밑창 하이힐로, 대문 한구석에 뚫린 반려동물용 출입구를 툭툭 찼다.
그녀의 눈에 잔혹한 재미가 넘실거렸다.
“네가 이 개구멍으로 기어 들어오면 아빠 만나게 해줄게. 어때?”
나는 곁에 서서 서지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눈에서 피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감히 어찌... 어찌 내 아이를 이따위로 모욕한단 말인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과 분노가 이성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나는 아들을 향해 미친 듯이 손을 내저으며 제발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엄마는 이미 죽었어, 나 때문에 네가 이런 굴욕까지 당할 필요는 없어. 솔찬아, 제발 가... 집으로 돌아가란 말이야!’
아들은 고개를 들어 허공에 선 나를 빗겨 지나, 저 멀리 환하게 불을 밝힌 저택을 바라보았다.
“약속 지키는 거죠?”
서지윤은 멈칫하더니 이내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어댔다.
“당연히 지키지.”
아들은 입술을 짓깨물며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차가운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얼어붙은 몸을 끌어 좁은 개구멍 속을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구멍을 통과하는 내내 아들은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솔찬이는 괜찮아. 솔찬이는 안 울 거야. 솔찬이는 엄마 깨워야 해...”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서지윤은 휴대폰을 꺼내 이 굴욕적인 순간을 모조리 영상으로 남겼다. 그 눈빛에 실린 잔혹한 흥분과 의기양양함은 숨겨지지 않고 넘쳐흘렀다.
“우리 솔찬이 참 착하네. 역시 정설아 새끼답다. 태생부터 천박한 핏줄이라니까. 자, 개처럼 한번 짖어봐. 아줌마 좀 웃게.”
한창 신나게 웃고 있던 찰나, 등 뒤에서 갑자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서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서지윤은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아들을 일으켜 세워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는 척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솔찬이가 널 찾아왔길래 내가 같이 좀 놀아주고 있었어.”
“그래?”
한성균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서지윤은 얼른 딴청을 피우며 화제를 돌렸다.
“성균 씨, 밖이 이렇게 추운데 얼른 솔찬이 데리고 들어가자. 애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서지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들도 고개를 들어 상처 입은 얼굴을 내보이며 한성균의 눈빛에서 안쓰러움을 조금이라도 찾으려 애썼다.
예전처럼 아빠가 자신을 품에 꼭 안아 주며 달래주기를 바란 까닭이었다.
하지만 한성균의 시선은 아들의 이마에 난 상처에 가만히 머물더니, 이내 차갑게 굳어버렸다. 그 눈빛에 깃든 것은 다정한 걱정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서늘한 분노였다.
“정설아 그 여자는 애를 어떻게 키우기에 이 모양이야? 전에는 애 핑계로 얼씬거리더니, 이제는 아주 별 미친 자작극을 다 벌이네. 이러면 내가 마음이라도 약해질 줄 알고? 쯧, 착각도 유분수지.”
남자는 다시 서지윤을 돌아보며, 금세 꿀이라도 떨어질 듯 다정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지윤아, 넌 너무 마음이 약해서 문제야. 그러니까 저런 여자의 얄팍한 속셈에 매번 당해주는 거잖아.”
그 기함할 소리에 나와 아들은 망치로 맞은 듯 그저 멍하니 굳어버렸다.
제3화
특히 아들은 입을 벙긋거리다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아빠...”
어쩌면 그 두 글자가 남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건드린 걸까. 한성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으나, 이내 그 눈빛에 서린 한기는 매서운 눈보라보다 더 싸늘하게 굳어졌다.
“말해. 이번엔 또 무슨 속셈이야? 돈이야? 집이야?”
아래로 툭 떨어진 아들의 손은 이미 꽉 쥔 주먹이 되어 있었지만, 아이는 감히 변명 한마디 내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예전에도 아들은 서지윤이 자신을 괴롭힌다며 한성균에게 털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서지윤이 눈물을 쥐어짜며 몇 마디 변명을 늘어놓자, 한성균은 오히려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 아들을 부추겨 그녀를 모함한 것이라 단정 지어버렸다.
그때 한성균은 나를 지하실에 꼬박 일주일 동안이나 가두었고 아들 역시 일주일 내내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자 아들은 몸서리를 치며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아무리 불러도 엄마가 안 일어나요. 아빠의 깃털 펜 나한테 주면 안 돼요?”
그 순간, 한성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안 일어난다니 무슨 소리야? 네 엄마는 고작 400cc 헌혈했을 뿐인데...”
“성균 씨!”
서지윤이 다급히 그의 말을 끊으며 비명처럼 소리쳤다.
한성균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남자의 의아한 눈빛을 받은 서지윤은 몸을 굳히며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섣달그믐이잖아. 솔찬이가 늦게 돌아가면 설아 언니가 분명 걱정할 텐데 그까짓 깃털 펜 하나, 얼른 줘서 보내. 소중한 명절 기분 망치지 말고.”
아니나 다를까, 한성균은 금세 아들에게 가 있던 시선을 거두며 표정을 살짝 풀었다.
“지윤아, 넌 여전히 참 마음이 고와. 그래, 솔찬아. 아빠 따라오렴.”
밝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눈부신 조명 아래 아이의 얼굴에 난 상처와 피투성이 몰골이 한층 더 참혹하게 도드라졌다.
그때 서지윤의 딸 하율이 다가와 엉망이 된 아들을 훑어보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천진하게 물었다.
“아저씨, 얘는 누구예요? 거지예요? 너무 더러워요.”
여자아이의 천진난만한 말에 아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화끈 달아올랐다.
아들은 아빠가 설명해 주기를 바라며 기죽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남자는 무언가에 자극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혐오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들을 차갑게 훑어내렸다.
“네 엄마가 너한테 이렇게 불쌍한 척 연기라도 하라든? 제 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오면 내 마음이 약해질 줄 알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남자의 매몰찬 비난이 꽂히자마자 붉게 달아올랐던 아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싹 가셔나갔다. 그 자리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창백함과 처연함만이 남았다.
아이는 비로소 속으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빠는 이제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한성균은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버린 뒤였다.
그저 서지윤만이 우쭐한 얼굴로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는 가식적인 동정심이 넘쳐흘렀다.
“쯧쯧, 가엾기도 해라. 아빠한테마저 버려진 꼴이라니. 아니면 나를 ‘엄마’라고 한 번 불러볼래? 그럼 특별히 곁에 두고 내 강아지 노릇이나 하게 해줄 텐데, 어때?”
“꿈 깨세요!”
아들은 고사리 같은 두 손을 꽉 쥔 채 새빨개진 눈시울로 분노에 겨워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줌마는 내 엄마가 아니에요. 내 엄마는 정설아 하나뿐이지, 아줌마가 아니라고요! 너무 우쭐대지 말아요, 우리 엄마가 깨어나면 반드시 내 복수를 해줄 테니까!”
아들은 이를 악물고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만약 내가 두 번 다시 깨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이 무너져 내릴까.
앞으로 다가올 거친 세상의 파도를 아이가 무슨 수로 견뎌낸단 말인가.
이제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아이인데.
눈물이 시야를 가리는 사이, 서지윤 역시 아들의 반응에 순간 이성을 잃고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눈동자를 굴려 한성균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힐끗 보더니, 이내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당황한 척 소리쳤다.
“내 휴대폰 어딨지? 내 휴대폰이 없어졌어.”
서지윤은 다급하게 온몸을 더듬더니 마침내 시선을 아들에게 고정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솔찬아, 혹시 네가 내 휴대폰 훔친 거니?”
아들은 화들짝 놀라 즉시 반박했다.
“안 훔쳤어요, 아줌마 휴대폰은 아까...”
짝!
차마 다 못한 말이 아들의 입술 사이에서 턱 멈춰 버렸다.
한성균은 한 손에 깃털 펜을 꽉 쥔 채, 맞아서 붉게 달아오른 아들의 뺨을 삿대질하며 걷잡을 수 없는 실망감을 터뜨렸다.
“네가 앙심을 품고 찾아온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예전에 네 엄마가 시켜서 아줌마 모함하더니 이젠 도둑질까지 해? 나한테 어떻게 너 같은 애가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정말!”
제4화
“말해, 휴대폰 어디다 숨겼어? 당장 안 내놔!”
나는 순간 이성을 잃고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 아들 앞을 가로막은 채,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내 아이를 때리느냐고, 악을 쓰며 따져 물었다.
서지윤이 지껄이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다 믿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분노를 보지 못했다.
아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눈시울에서 눈물이 구슬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 아줌마 휴대폰 안 훔쳤어요. 엄마도 나한테 나쁜 거 가르친 적 없고요. 저 나쁜 여자가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요! 저 아줌마는 아빠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계속 나랑 엄마를 괴롭혔단 말이에요! 아빠가 속고 있는 거라고요!”
아들의 눈물 섞인 호소에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절규가 남자의 화를 더욱 돋울 뿐이었다.
한성균은 들고 있던 깃털 펜을 던져 버리고는 다짜고짜 아들을 바닥에 짓누르며 강제로 옷을 벗겨대기 시작했다.
“말해, 휴대폰 어디다 숨겼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가지가 하나둘씩 수치스럽게 벗겨져 나갔고 아들의 자존심 역시 그 옷가지들과 함께 한성균의 발밑에 처참히 짓밟혔다.
아이는 무력한 어린 짐승처럼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아니에요, 나 정말 안 훔쳤단 말이에요!”
하지만 한성균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거칠게 손을 놀렸다. 마구잡이로 꼬집힌 아들의 작은 몸에는 시퍼런 멍이 얼룩덜룩 번져갔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우는 아들을 보자 내 심장도 갈기갈기 찢겨 나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한성균을 떼어 놓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영혼일 뿐이었으니까.
서지윤은 여유롭게 이 광경을 감상하고 있었고 눈빛에 어린 조소는 손에 잡힐 듯 짙었다.
마지막 옷가지마저 벗겨지자 아들은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았다. 그저 한성균을 바라보는 눈빛에 어느새 증오가 서려 있을 뿐이었다.
물건을 찾지 못하자 한성균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향한 아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발견하고는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벌거벗은 아들을 질질 끌고 가 눈밭에 내동댕이쳤다.
“끝까지 고집 피울 거면, 눈밭에 무릎 꿇고 앉아서 정신 똑바로 차려!”
아들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한성균이 다시 차갑게 쏘아붙였다.
“내 직성 풀릴 때까지 그러고 앉아 있어. 그래야 이 깃털 펜 줄 테니까.”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가 순식간에 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솔찬이가 엄마인 나를 위해 기꺼이 그 말에 따를 거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정말이지 아이가 나 때문에 이런 모욕까지 견디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조그만 아이가 섣달그믐 밤의 뼛속까지 시린 눈밭에 덩그러니 무릎을 꿇은 것이다.
매서운 눈보라가 작은 몸을 조금씩 뒤덮어 가는데도, 녀석은 끝내 꼼짝하지 않았다.
한편, 서지윤은 딸을 안고 따뜻한 실내에 앉아 가식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성균 씨, 솔찬이 아직 어린애인데... 이러는 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한성균은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눈으로 창밖을 주시하며 차갑게 내뱉었다.
“잔인할 게 뭐 있어? 먼저 잘못을 저지른 건 저 녀석이야. 이만한 시련조차 견뎌내지 못하면, 나중에 한씨 가문 후계자 노릇은 어떻게 하겠어.”
그 말에 서지윤의 입가에 맴돌던 웃음기가 싹 가시며 숨기지 못한 질투심이 눈동자 속에서 살벌하게 번뜩였다.
이 꼴을 보고도 한성균이 그 버러지 같은 놈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찢긴 채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에 시선이 닿자 그녀의 마음은 다시금 느긋해졌다.
‘염두에 두면 또 어쩔 텐가? 어차피 내 손바닥 안인 것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지윤은 한결 짙어진 미소를 띠며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능숙하게 한성균의 관심을 돌렸다.
창문 안쪽은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창밖은 하늘을 집어삼킬 듯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끝내 추위를 견디지 못한 아들은 새하얀 눈밭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스라이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아이는 쉴 새 없이 읊조렸다.
“조금만 더 견디면 돼. 아빠 화가 가라앉으면 엄마를 깨울 수 있을 거야.”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서재에서 업무를 보던 한성균은 그제야 아들 생각이 나 집사를 호출했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솔찬이 녀석 잘못을 뉘우치던가요?”
집사는 사색이 된 얼굴로 더듬거리며 보고했다.
“대표님,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이미 눈밭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습니다...”
“뭐라고?”
한성균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지며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로 그때, 책상 위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한성균 씨 맞으십니까?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한성균 씨 명의의 임대 주택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