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첫사랑에게 신장을 빼앗겼다

GoodNovel 완결

남편의 첫사랑이 급성 신부전에 걸렸다. 그리고 그녀와 이식 적합 판정을 받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 여자를 살리기 위해 남편은 임신 6개월 차인 내게 아이를 지우라고 강요했다. 그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조금만 착하게 굴면 안 돼? 넌 아이 하나를 잃을 뿐이지만, 유나는 목숨을 잃는 거잖아.” 나는 끝까지 거부했지만 그는 죽어버리겠다며 나를 몰아붙였다. 결국 수술대 위에서 나와 아이는 함께 목숨을 잃었다. 남편의 첫사랑은 신장 이식에 성공해 살아남았다. 모든 일이 분명 그가 원한 대로 됐는데 막상 내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남편은 무너져 내렸다.

챕터 (1)

第1章

남편의 첫사랑이 급성 신부전에 걸렸다. 그리고 그녀와 이식 적합 판정을 받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 여자를 살리기 위해 남편은 임신 6개월 차인 내게 아이를 지우라고 강요했다. 그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조금만 착하게 굴면 안 돼? 넌 아이 하나를 잃을 뿐이지만, 유나는 목숨을 잃는 거잖아.” 나는 끝까지 거부했지만 그는 죽어버리겠다며 나를 몰아붙였다. 결국 수술대 위에서 나와 아이는 함께 목숨을 잃었다. 남편의 첫사랑은 신장 이식에 성공해 살아남았다. 모든 일이 분명 그가 원한 대로 됐는데 막상 내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남편은 무너져 내렸다. 제1화 죽은 뒤, 내 영혼은 몸에서 빠져나와 허공을 떠돌았다. 미처 봉합하지도 못한 배, 신장 하나만 남은 몸, 그리고 옆에 놓인 이미 사람의 형태를 갖춘 아이까지. 내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은 흰 천에 완전히 덮였고, 시신은 수술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때 보였다. 내 남편 방지훈이 다른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초조함과 걱정이 가득했다. 내 시신이 방지훈 곁을 지나갔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내가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그가 걱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자 방지훈이 잽싸게 달려갔다. “선생님, 유나는요? 괜찮습니까?” “신장 이식 수술은 아주 잘 끝났습니다. 마취에서 깨면 면회하셔도 됩니다.” 의사는 환하게 웃으며 좋은 소식을 전했고, 방지훈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병실 안에서 장유나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방지훈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다가가 장유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유나야, 많이 힘들었지.” “난 괜찮아.” 장유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방지훈의 뺨을 쓰다듬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지훈아,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서연이 곁에 있어 줘야지. 나, 서연이한테 너무 미안해.” 말을 마치자 눈물이 장유나의 뺨을 타고 흘렀다. 방지훈이 곧바로 말을 끊었다. “이 와중에도 서연이 걱정을 해? 그 독한 여자만 아니었어도 네 수술이 이렇게까지 늦어지진 않았어. 다 허서연 때문이야. 괜히 너만 더 고생했잖아.” 방지훈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원망이 가득했다. 나는 숨이 턱 막혔고 심장이 꽉 조이는 듯 아팠다. 허서연. 방지훈이 말한 그 독한 여자, 바로 나였다. 사람은 죽을 때 지난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하지만 서로를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을 직접 보고 있자니, 내 머릿속에는 방지훈에게 떠밀리듯 수술대에 올라갔을 때의 두려움과 끝없는 고통만이 떠올랐다. 그날 방지훈은 내 손목을 움켜쥐고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허서연, 맹세할게. 네가 유나를 살려 주기만 하면 앞으로는 너랑 제대로 살아볼게. 안 그러면 유나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말은 부탁이었지만 실상은 협박이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면서 내게 많은 재산을 남기지 못했다. 회사에는 빚만 잔뜩 남아 있었고, 그 빚을 대신 갚아 준 게 방지훈의 집안이었다. 그 집에서 나를 거둬 준 순간부터 내 목숨은 방지훈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방지훈이 정말 죽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한마디 협박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이 남자를 5년 동안 사랑했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나는 우리 아이를 지우고, 내 신장을 장유나에게 이식해 주기로 했다. 이 일만 끝나면 정말 나와 제대로 살아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수술 중 과다출혈이라는 돌발 상황이 벌어졌고, 의료진은 가족에게 수없이 연락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 누군가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나는 절망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지금, 내 시신은 차가운 영안실에 누워 있지만 방지훈은 여전히 첫사랑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제2화 한 달 뒤, 장유나는 퇴원했다. 방지훈은 몸조리를 하라며 그녀에게 별장까지 한 채 사 줬고, 무사히 퇴원한 것을 축하한다며 지인들을 잔뜩 불러 파티까지 열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방지훈 곁에 묶어 놓은 듯했다. 나는 그와 장유나가 매일 붙어 다니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 했다. 장유나는 원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걸 좋아했다. 장유나는 몸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면서 파티 내내 방지훈에게 바짝 붙어 애정 행각을 벌였다. 두 사람이 너무 대놓고 행동하니 주변에서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지훈의 친구들이 내 얘기를 꺼내자 장유나는 속으로 불쾌해하면서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지훈아, 우리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난 아직 아무런 명분도 없는데 이런 소문이 나면 서연이가 화낼 거야.” “이렇게 좋은 날에 그 여자 얘기는 왜 꺼내? 재수 없게.” 내 얘기가 나오자 방지훈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짜증이 떠올랐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장유나의 손을 잡고 큰 소리로 선언했다. “유나는 내가 평생 가장 사랑할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여기서 상관없는 사람 얘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한창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 혼인신고를 한 아내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말라는 뜻이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방지훈의 두 눈에는 깊고 차가운 기색이 가득했고, 내뱉은 말은 잔인할 만큼 날카로웠다. 나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난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대체품일 뿐이야. 지훈이가 사랑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장유나였으니까.’ 어릴 때 우리 둘은 집안 어른들이 인정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어린 시절 방지훈이 무심코 던진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나는 그를 꼬박 10년이나 사랑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학생이 된 방지훈이 진짜 사랑인 장유나를 만난 순간, 우리 사이에 있던 감정은 모조리 사라졌다. 나는 내 마음을 접고 두 사람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다니며,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장유나가 갑자기 해외로 떠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방지훈은 매일 술에 취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지훈은 납치범들에게 습격당했고, 나는 혼자 그들을 유인해 방지훈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 줬다. 의식을 잃기 전, 그는 내게 약속했다. “서연아, 만약 내가 살아남게 된다면 평생 너한테 잘할게.” 그는 깨어난 뒤 정말 약속을 지켰다. 내게 최선을 다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하게 됐다. 결혼한 후 방지훈은 흠잡을 데 없는 다정한 남편이었고 우리는 겉보기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모범 부부였다. 하지만 장유나가 돌아오면서 모든 게 무너졌다. 잔잔하던 일상에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우리의 결혼생활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장유나는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떠났었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단단해 보이던 방지훈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가가 늦어졌다. 그러다 아예 외박하는 날이 늘었고, 집에 들어와 입만 열었다 하면 장유나 얘기뿐이었다. 나는 내가 조금만 더 참고 양보하면 언젠가 그가 마음을 돌려 나를 봐 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가 수술대 위에서 아이와 함께 죽는 일이 될 줄도 모르고. 제3화 “지훈아, 엄마가 너희 얼굴 못 본 지도 한참 됐구나. 내일 서연이 데리고 집에 와서 밥 먹자. 서연이 전화도 계속 안 되는데 대체 요즘 뭘 하느라 이렇게 바쁜 거니?” 며칠 뒤 방지훈의 어머니인 손정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때 장유나는 방지훈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손정미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눈가가 시큰해졌다. 손정미는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키워 준 사람이기도 했다. “엄마, 서연이는 정말 은혜도 모르는 애예요. 나한테 화가 났다 해도 엄마 전화까지 안 받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나를 얘기하는 방지훈의 얼굴에는 여전히 혐오가 가득했다. 나는 그의 앞에 서서 씁쓸하게 웃었다. 사랑이 사라지자 나는 어느새 그에게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지훈아, 네 마음에 아직 그 여자가 남아 있는 건 엄마도 알아. 그래도 넌 이미 서연이랑 결혼했어. 그럼 서연이한테 책임을 져야지. 안 그러면 내가 서연이 엄마를 무슨 낯으로 보겠어?” 손정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방지훈은 얼굴을 굳힌 채 몇 마디 대충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장유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달래듯 바라봤다. “지훈아, 서연이는 요즘 너한테 연락 안 해?” 장유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연락?” 방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연이 때문에 네가 죽을 뻔했는데 넌 왜 그 여자를 신경 써. 차라리 영영 사라지는 게 낫지.” 그러다 그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나야, 조금만 더 기다려. 서연이랑 이혼하면 네가 더는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되게 할게.” 장유나는 방지훈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괜찮아. 그냥, 그냥 서연이가 날 미워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서연이가 감히?” 방지훈은 말을 끊고 장유나의 어깨를 감싸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 정체 모를 불길이 치솟았다. 아마 정말 이혼할 생각이었는지, 그날 이후 방지훈은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내가 없자 그는 곧바로 짜증을 냈다. 방지훈은 마음만 먹으면 내 행방쯤은 금방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나를 찾지 못했다는 건 나에게 시간 낭비를 하기 싫어서였다. 그저 내가 제 발로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 소식이 없자 방지훈은 미친 듯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짜증도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방지훈은 내가 건 전화라고 생각했는지 화면도 확인하지 않고 받았다. “허서연, 이제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감히 내 전화를 씹어?” “허서연 씨 보호자분 맞으십니까? 시신이 병원에 들어온 지 거의 두 달이 됐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오셔서 인수해 주셔야 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의료진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지훈이 벌떡 일어섰다. 허공에 멈춘 손이 몇 초간 굳어 있더니 이내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장난도 정도껏 하세요. 허서연이 그렇게 쉽게 죽을 인간입니까? 세상이 끝나도 제 목숨이 아까워서 못 죽을 여자예요.” “죄송합니다. 현재 등록된 최우선 연락처가 선생님뿐이라 연락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신원 미상 시신으로 처리하세요.” 방지훈은 싸늘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은 걸 보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나는 웃었다. 방지훈은 단 한 번도 내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에 나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악독한 여자였다. 정말 내가 죽기를 바랐던 사람. “장예린, 서연이 어디 있어? 당장 집으로 기어들어 오라고 해. 그만 숨으라고.” 전화를 끊자마자 방지훈은 화가 잔뜩 난 채 장예린에게 전화했다. 장예린은 내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방지훈, 너 미쳤어? 나야말로 묻고 싶거든? 서연이 어디다 숨겨놓은 거야? 연락이 끊긴 지가 얼마나 된 줄 알아?” 방지훈의 이유 없는 분노에 장예린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내일 당장 집에 들어오라고 전해. 안 그러면 밖에서 죽어도 내가 시신 수습 안 해 줄 테니까.” 방지훈은 다급해 보였다. 나는 방지훈이 왜 저렇게 서두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방지훈, 서연이 실종됐어. 서연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나 절대 너 가만 안 둬.” 장예린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방지훈은 비웃기만 했다. “이번엔 이런 수법이야? 이걸 핑계로 내 동정이라도 받으려고? 하, 정말 질린다.” 눈물이 시야를 흐렸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내 마음도 완전히 죽어버렸다. 제4화 어차피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늘 비열하고 악독한 여자였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장유나를 위층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생각은 3년 전으로 돌아갔다. 장유나가 막 귀국했던 해였다. 회사에서 파티가 열렸고, 방지훈은 혼인신고를 한 아내인 내가 버젓이 있는 자리로 장유나를 데려왔다. 두 사람은 팔짱까지 낀 채 재계 인사들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갔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웃음거리처럼 쳐다봤다.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팠지만 울음을 참으며 한쪽으로 피했다. 차라리 안 보면 덜 괴로울 것 같았다. 그런데 장유나가 굳이 내게 다가와 가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나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장유나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나는 장유나가 떨어지기 직전 나를 향해 차갑게 웃는 걸 분명히 봤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비명을 질렀다. 나는 피바다에 쓰러져 있는 장유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는데 마침 그녀를 향해 달려오던 방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야. 정말 내가 아니야.’ 하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재벌가 사모님, 내연녀에 잔혹한 보복. 고의 살해 시도!] 당시 언론은 앞다투어 기사를 쏟아 냈다. 방지훈은 겨우 뒷수습했다. 그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나를 병원으로 끌고 갔다. 그전에 나는 내가 장유나를 민 게 아니라고 수도 없이 말했고 심지어 CCTV 영상까지 가져와 내 결백을 증명하려 했지만 방지훈은 아예 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내가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방지훈이 장유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한 꽃다발을 안은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병실로 들어갔다. “지훈아.” 장유나가 창백한 얼굴로 방지훈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나를 발견하자마자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돌변했다. “허서연, 네가 날 싫어하는 거 알아. 내가 지훈이를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알고. 네가 날 계단에서 민 것도 원망하지 않을게. 애초에 내가 잘못한 거니까.” 나는 설명하려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 순간 장유나가 온몸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허서연, 내가 잘못했어. 이제 지훈이한테 안 매달릴게. 그러니까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마치 끔찍한 악몽이라도 꾸는 사람처럼 반응하니 순간 나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하서연을 당장 내보내. 유나를 계단에서 밀어 놓고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와?” 장유나 곁에 있던 부잣집 아가씨가 앞으로 나와 나를 밀쳤다. 나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방지훈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는 나를 흘끗 보며 말했다. “사과하러 온 거야.” “흥, 사과하면 다야?” 여자가 비웃었다. “진심으로 미안하면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장유나가 웃으며 말렸다. “그만해.” 나는 멍한 얼굴로 벽을 짚고 일어섰다. 그 순간 방지훈의 두 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무릎 꿇으라잖아. 그럼 꿇어. 애초에 네가 잘못한 일이야.” 나는 몸부림치며 방지훈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해? 내가 민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넌 끝까지 나를 안 믿어?” 방지훈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짜증을 내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어깨를 누르는 힘은 점점 강해졌다. “지훈아, 서연이 그만 몰아붙여.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장유나는 착한 사람인 척 끼어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지훈과 팽팽하게 맞섰다. 병실 안에서 침묵이 흐르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러다 갑자기 어지럼증이 밀려와 나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기적처럼 기쁜 소식을 들었다. 임신 2개월이라니. 그동안의 끔찍한 일들이 그 소식 하나로 전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방지훈은 더 이상 장유나 앞에서 내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나를 대하는 태도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나는 아이만 태어나면, 장유나만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방지훈과 다시 예전처럼 평범한 부부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순진했다. 임신 6개월째 되던 날 방지훈이 웬일로 일찍 집에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검사 결과지가 들려 있었다. 나와 장유나의 신장 이식 적합성을 확인한 결과였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방지훈은 내 옆에 앉아 오랜만에 나를 품에 안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포옹이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품에서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너도 알잖아. 유나는 신부전증으로 앓고 있어.”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이 지워. 그리고 네 신장 유나한테 줘.”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유나한테 진 빚이잖아. 속죄한다고 생각해.” 마음이 식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머리 위로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뼛속까지 차가워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방지훈의 태도가 달라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가 나를 용서한 게 아니라 더 큰 벌을 준비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남자가 제 손으로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이게 그가 말하는 복수였던 모양이다. 제5화 쾅! 전화를 끊은 방지훈은 화를 참지 못한 듯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 휴대전화가 깨지는 소리에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는 잠시도 진정하지 못했다. 금세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다시 주워 들고 비서에게 전화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행방을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내 번호에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화면을 보니 수신자는 나였다. [허서연. 하루 준다. 당장 내 앞에 나타나. 안 그러면 뒷감당은 네가 알아서 감당해.]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도 네 앞에 있는데 네가 보지 못할 뿐이야. 내 휴대전화는 이미 창고에 처박혀 방전된 지 오래일 거야.’ 반나절이 지나도 답장이 없자 방지훈의 얼굴에는 짙은 불안감이 드리워졌다. 잠시 후 그는 소파에 걸쳐 둔 외투를 집어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급히 따라붙었다. ‘설마 나를 찾으러 가는 걸까?’ 나는 궁금해졌다. 하지만 안방에서 비명이 들려오자 방지훈은 현관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틀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장유나는 악몽이라도 꾼 듯했다. 방지훈이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장유나는 눈을 떴다. “가위에 눌렸어?” 방지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장유나를 바라봤다. 장유나는 곧장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지훈아, 꿈에서 서연이가 나한테 와서 신장 돌려 달라고 했어. 그리고 네가 서연이를 좋아하게 돼서 나를 버리는 꿈도 꿨어!” “흑흑, 너 서연 때문에 나를 버리진 않겠지?” 장유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방지훈을 올려다봤다. 굳이 내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보니 의도가 뻔했다. 방지훈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줬다. “그럴 일 없어. 나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야. 허서연이 아니라.” 장유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자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이미 한 줌의 영혼이 된 지금도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자 장유나의 얼굴에 잠깐 득의양양한 미소가 스쳤지만, 곧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럼 서연이랑은 연락됐어?” “휴대전화가 꺼져 있어.” 방지훈은 얼굴을 굳혔다. “서연이는 원래 노는 거 좋아하잖아. 기분 풀려고 어디 여행이라도 갔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유나가 그를 달랬다. 뜻밖에도 방지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장유나에게 일찍 자라고 말한 뒤 방을 나갔다. 방 안에 혼자 남은 장유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방지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연약한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허서연, 지훈이는 내 거야. 누구도 못 빼앗아. 뭐, 넌 이미 죽었으니까 이제 내 상대도 안 되겠지만. 하하하하!” 장유나는 혼잣말하며 미친 듯이 웃었다. 그녀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에 나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유나는 대체 언제 내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 걸까?’ 다음 날 아침, 방지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대표님, 사모님 행방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비서의 전화였다. 방지훈은 비서의 망설이는 말투를 눈치채지 못한 듯 코웃음을 쳤다. “역시 또 허서연이 꾸민 짓이었네. 하는 짓이 예나 지금이나 유치하기 그지없어.” 착각이었을까. 그 말을 하는 순간 방지훈이 목소리엔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당장 데려와. 난 집에서 기다릴 테니까.” 그는 목소리를 굳히며 명령하듯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은 2개월 전 병원에 들어간 뒤로 나온 기록이 없습니다. 확인해 보니...” 비서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힘겹게 이어 갔다. “사모님은 2개월 전 수술 중 사고로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시신은 병원 지하 1층 영안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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