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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합격 후, 두 부자는 무너졌다
어린이날, 가장 화제가 된 SNS는 나에 관한 글이었다. [고 대표가 아들과 함께 첫사랑의 생일을 챙겼다는데, 드디어 여민지와 이혼하려는 건가?] 나는 조용히 ‘좋아요’를 눌렀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결혼기념일을 위해 준비해 둔 풍선을 터뜨리고 있었다. [여보.] 남편이 다급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아들이 갑자기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떼를 써서 내가...] 핸드폰 벨 소리 너머로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아빠, 이모가 오늘 밤 나랑 같이 잘 수 있대!] 나는 엉망이 된 집 안을 바라보았다. 풍선은 힘없이 축 처져 있었고, 케이크 위의 크림은 이미 굳어 있었다. “나한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무슨 일인지 다 알아.” 고지훈 당신과 아들은 여기까지야, 이제 나한테 당신들 필요 없어.
챕터 (1)
第1章
어린이날, 가장 화제가 된 SNS는 나에 관한 글이었다.
[고 대표가 아들과 함께 첫사랑의 생일을 챙겼다는데, 드디어 여민지와 이혼하려는 건가?]
나는 조용히 ‘좋아요’를 눌렀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결혼기념일을 위해 준비해 둔 풍선을 터뜨리고 있었다.
[여보.]
남편이 다급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아들이 갑자기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떼를 써서 내가...]
핸드폰 벨 소리 너머로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아빠, 이모가 오늘 밤 나랑 같이 잘 수 있대!]
나는 엉망이 된 집 안을 바라보았다.
풍선은 힘없이 축 처져 있었고, 케이크 위의 크림은 이미 굳어 있었다.
“나한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무슨 일인지 다 알아.”
고지훈 당신과 아들은 여기까지야, 이제 나한테 당신들 필요 없어.
제1화
고지훈이 아들과 함께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소파에 웅크린 채 TV를 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현관까지 달려가 남편과 아들에게 슬리퍼를 꺼내주고, 아들의 말랑한 볼에 입을 맞췄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엄마, 오늘은 왜 와서 뽀뽀 안 해줘?”
“민지야, 내 슬리퍼는 왜 안 가져다줘?”
나는 TV 볼륨을 높이며 말했다.
“나 지금 시간 없어.”
고지훈은 느긋하게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다음 아들을 먼저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설마 아직도 그깟 일로 삐쳐 있는 거야?”
“오늘 어린이날이잖아. 아들이 갑자기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는데, 내가 어떻게 애 기분을 망치겠어?”
“그런데 나 혼자서는 애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해연이한테 같이 가달라고 한 거야. 내가 대체 몇 번이나 설명해야 해?”
옆에 있던 아들이 잔뜩 화난 얼굴로 말했다.
“또 이렇게 괜히 화내고 있어! 해연 이모는 나한테 절대 이렇게 인상 쓰지 않아!”
고지훈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나를 바라봤다.
“들었지? 아들도 네가 이러는 걸 불편해하잖아.”
“대체 왜 이해하지 못해? 내가 너를 달래는 것도 다 네 체면 세워주려고 그러는 거야. 투정 부리고 화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 화 안 났어. 다 이해해.”
‘이해하지.’
나는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작년 내가 교통사고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그날처럼.
그때 고지훈은 전화 너머로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나 지금 급한 일이 있어. 조금 있다가 갈 테니까, 일단 네가 직접 구급차 불러.]
그런데 그 옆에서는 아들이 신나서 소리치고 있었다.
[아빠, 빨리 와! 해연 이모의 고양이 찾았대! 이모 울고 있으니까 빨리 가서 위로해줘!]
나는 피범벅이 된 도로에 누운 채 직접 119에 전화를 걸었다.
수술 동의서의 ‘보호자 서명’란에는 떨리는 손으로 ‘보호자 없음’이라고 썼다.
고지훈은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나는 담담하게 고지훈의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뭘?”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고지훈은 갑자기 서류가방에서 벨벳 상자 하나를 꺼내 찻상 위에 툭 던졌다.
“자, 결혼기념일 선물이야.”
나는 상자 안에 놓인 목걸이를 바라봤다.
펜던트에는 ‘HY’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임해연의 이니셜이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결혼기념일 선물조차 남의 것을 주워다가 준 것이었다.
그런 남편은 임해연의 생일에는 아들과 함께 빵집에 가서 오후 내내 직접 케이크까지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고마워.”
내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그러자 고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이거 나랑 아들이 얼마나 정성 들여서 고른 건데. 넌 웃지도 않네? 마음에 안 들어?”
“좋아. 고마워.”
나는 목걸이에 새겨진 거슬리는 ‘HY’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고지훈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고지훈이 무슨 선물을 주든, 심지어 회사 연말 행사에서 받아온 사은품을 주어도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했을 테니까.
그러고는 언제나 달콤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보, 사랑해.”
그렇게 몇 년을 한 번도 빠짐없이 내 생일을 이렇게 보냈다.
제2화
결혼기념일만 다가오면 나는 석 달 전부터 축하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사진을 모아 앨범을 주문 제작하고, 영상을 찍고, 출장 중인 고지훈이 있는 도시까지 직접 날아가 깜짝이벤트를 준비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선물 상자를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나는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 가방을 챙긴 뒤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고지훈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내 팔을 확 잡아당겼다.
“이 시간에 어디 가? 아들이 네가 재워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고지훈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웃기네.”
“예전에 내가 당신한테 새벽 3시에 어디 가냐고 물어보기만 해도 선 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제는 내가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까 오히려 화를 내네. 이번엔 당신이 내 행적을 캐묻고 있잖아.”
말을 마친 나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등 뒤에서 닫히는 순간, 억눌린 고지훈의 고함이 들려왔다.
“맨날 삐쳐서 난리나 치고! 오늘 밤 안 들어올 거면 앞으로 아예 들어오지 마!”
고지훈의 목소리에는 내가 두려워 결국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배어 있었다.
나는 비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고지훈에게 나는 아마 영원히 그를 떠날 수 없는 광대일 것이다.
비굴하고, 의존적이며, 선택권조차 없는 사람.
하지만 광대도 언젠가는 그 가면 속에서 지치기 마련이다.
이 결혼 생활은 이미 숨 막힐 만큼 비좁았다.
그러니 이제 내가 먼저 이 무대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노래방에서 사촌 동생이 잔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게 웬일이야? 우리 집 24시간 대기조인 착한 아내가 집에서 '주상'과 '세자' 시중 안 들고?”
“무슨 일 있어?”
“어린애가 별걸 다 캐묻는다.”
나는 웃으며 사촌 동생의 어깨를 툭 밀었다.
“앞으로 재미있는 일 있으면 나도 꼭 불러.”
사촌 동생이 코웃음을 쳤다.
“언니가 집에서 빠져나올 수나 있어? 남편과 아들을 두고 나올 수 있겠어?”
사촌 동생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고지훈과 결혼한 지난 5년 동안, 나는 자신을 세상과 단절된 섬처럼 스스로 고립을 자처했다.
친구들이 모임에 나오라고 연락해도 나는 늘 말했다.
“다음에 갈게.”
이젤 위에 미처 완성하지 못한 유화에는 어느새 두꺼운 먼지가 내려앉았다.
가장 좋아하던 서점에도 더는 가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잔에 든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응. 이제는 버릴 수 있어.”
두 사람이 나를 버릴 수 있다면, 나 역시 그들을 버릴 수 있었다.
새벽 3시, 나는 온몸에 술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는 눈 밑이 시커멓게 꺼진 고지훈이 앉아 있었다.
구겨진 정장은 마치 절인 채소처럼 너저분했고, 넥타이는 한쪽으로 비뚤어져 있었다.
결혼 5년 만에 처음 보는 고지훈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내가 돌아온 걸 보자 고지훈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왔네. 결국 나랑 아들 없이는 안 되겠다는 거 알아?”
“난 네가 진짜 그렇게 배짱 있게 집을 나갈 줄 알았어. 그런데 결국 나 없이는 못 살겠지? 그럼 이제 얌전히 좀 있어. 알겠어?”
나는 고지훈 옆에 앉아 술 냄새 섞인 트림을 했다.
고지훈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새벽에 나가서 술 마신 거야? 누구랑?”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고지훈이 밤늦게 술자리에 참석하고 돌아오면, 나는 집에서 그를 기다렸다.
온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는 고지훈에게 물으면 그는 늘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는 일 때문에 술자리에 간 거야. 매번 누구랑 있었는지, 뭘 했는지 그렇게 꼬치꼬치 묻지 좀 마.”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었다.
이번에는 고지훈이 나를 추궁하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의 말다툼 소리에 잠에서 깬 아들이 맨발로 거실로 뛰어나왔다.
술 냄새를 맡은 아들은 코를 찡그리며 고지훈의 곁으로 물러섰다.
“엄마 술 냄새나! 해연 이모는 엄마랑 달라. 이모한테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나. 꼭 요정 같다고!”
“그리고 이모는 케이크도 만들어주고 아이스크림도 만들어줘. 엄마는 맨날 화만 내고 나한테 공부하라고만 하잖아.
“이것도 못 먹게 하고 저것도 못 먹게 하고. 엄마는 원래 못생겼는데 오늘은 냄새까지 나.”
나는 그 두 부자를 바라봤다.
지친 내 눈에는 체념만이 남아 있었다.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어서 낳은 아들이었다.
지난 5년 동안 아들을 위해 삼천 번이 넘는 밤중 수유를 견뎌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아이가 배탈이 나기 쉬웠고, 설사하면 금세 열까지 오르는 아이였다.
제3화
나는 밤새도록 아들을 돌봤지만, 아들은 내가 얼마나 고생하며 자기를 돌봤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고작 몇 번 만나본 것이 전부이면서도, 아들은 입만 열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임해연에 관해 이야기했다.
고지훈은 전등을 켜더니, 아들이 한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우리 아들이 뭐라고 하는지 잘 들어. 너 지금 엄마 노릇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
“해연이 때문에 이렇게 끝도 없이 난리를 피우는 게 그렇게까지 큰일이야? 내가 해연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집에서 누가 더 목소리를 내는지는 결국 누가 돈을 더 버느냐에 달린 거야.”
“너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면서도 월급은 얼마 되지도 않잖아. 내가 너를 먹여 살리고 있는 이상, 똑똑히 알아둬.”
“우리 부자를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누군지는 너도 잘 알겠지.”
나는 더 이상 두 사람의 반복되는 원망과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았다.
침실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당신 말이 다 맞아.”
그러자 고지훈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 목소리가 심하게 쉬었다.
“넌 왜 싸울 때마다 죽을 사람처럼 굴어? 대체 내 감정은 조금이라도 신경 쓰는 거야?”
술에 취해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했다.
나는 순간 발을 헛디뎠고, 종아리가 찻상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고지훈은 거의 몸을 던지듯 달려왔다.
그리고 내 뒤통수와 바닥 사이에 손바닥을 받쳤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어?”
나는 고지훈의 가슴을 밀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고지훈을 바라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고지훈은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냉담하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결국 고지훈은 손을 놓았다.
나는 그대로 침실로 돌아가 깊이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벽 5시였다.
전날 술을 잔뜩 마셨는데도 생체 시계는 어김없이 나를 제시간에 깨웠다.
고지훈은 갓 뽑은 수제 면을 좋아했고, 아들은 갓 빚은 고기만두를 넣은 만둣국만 먹었다.
두 사람의 입맛은 유난히 까다로웠다.
가사도우미가 만들어준 음식은 냉장고 냄새가 난다며 싫어했고, 밖에서 사 온 아침 식사는 기름이 비위생적이라며 먹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매일 새벽 5시에 어김없이 일어나야 했다.
아침 7시가 되면 두 사람이 갓 만든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 무시하고 억지로라도 다시 잠들기로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들 천희가 서 있었다.
“나쁜 엄마! 왜 아직도 안 일어나? 오늘은 나랑 아빠 아침밥 안 해줘? 나 배고프단 말이야!”
나는 하품하며 대답했다.
“오늘은 쉴 거야.”
“안 돼!”
천희는 갑자기 달려들어 내 잠옷을 주먹으로 마구 두드렸다.
“해연 이모가 그랬어. 좋은 엄마는 아파도 밥을 해줘야 한대!”
“난 좋은 엄마 아니야. 먹고 싶으면 가사도우미한테 해달라고 그래.”
그러자 천희는 화가 난 작은 짐승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가사도우미가 해주는 건 맛없단 말이야!”
“아빠, 엄마가 나한테 밥 안 해준대! 그럼 해연 이모한테 와달라고 해. 이모가 해주는 아침밥이 얼마나 맛있는데! 이모는 나한테 밥도 해주겠다고 했어!”
식탁에 앉아 있던 고지훈은 눈 밑이 시커멓게 꺼져 있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듯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애한테 괜히 화풀이하지 마.”
“네가 피곤해서 하기 싫은 거면 내가 해연이한테 와서 해달라고 할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큰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말끔하게 씻고 화장을 한 뒤 정장을 걸쳤다.
차 키를 챙겨 그대로 집을 나섰다.
멀리서 고지훈이 임해연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지훈의 옆을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나가는 거야? 식탁에 내가 끓여놓은 해장국 있어. 그거라도 먹고 가.”
나는 고지훈의 손을 단번에 뿌리쳤다.
“고맙지만 됐어.”
현관문이 닫히기 직전, 등 뒤에서 찻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고지훈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걸음을 잠시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크게 한 걸음씩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설계원으로 향했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나는 고지훈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이곳에서 제대로 내 이름을 걸고 한번 크게 일해보고 싶었다.
제4화
“결혼했으면 안정적으로 사는 게 좋잖아.”
하지만 고지훈의 이 한마디에 나는 해외 유학의 기회를 포기하고, 꿈도 내려놓았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완전히 가정에 발이 묶였다.
집안일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우선적으로 내 업무 시간과 휴식 시간을 희생해 가며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쏟아부은 노력은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고지훈과 아들은 날이 갈수록 나의 정성과 수고를 무시하고 업신여겼다.
그리고 끝내 다른 여자를 끌어들여 내 존엄까지 짓밟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원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사직 의사를 밝혔다.
원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봤지만, 한편으로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넌 더 높이 날아가야 할 사람이었어. 어디로 갈 생각이야?”
“언제 떠날 생각이야?”
나는 가방 안에 넣어둔 합격 통지서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건축학과의 합격 통지서였다.
“영국이요. 모레 떠납니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동료 소준희가 다가왔다.
“영국으로 간다면서요? 그럼 고 대표님이랑 천희는 어떻게 해요?”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가족사진 액자를 뒤집어 놓았다.
사진 속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어둠 속에 묻혔다.
“우리 이혼할 거야.”
“그 사람들한테는 곧 새로운 아내와 엄마가 생기겠지.”
소준희는 뭔가 말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계원을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집에 돌아와 현관 센서 등이 켜지는 순간, 나는 거실에 놓인 여행용 캐리어를 발견했다.
고지훈은 그 안에 아들의 외투를 챙겨 넣고 있었고, 아들은 새로 산 공룡 책가방을 품에 안은 채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현관에는 명품 로고가 박힌 선물 상자가 버젓이 놓여 있었다.
임해연이 SNS에 갖고 싶다고 올렸던 최신형 가방이었다.
내가 돌아온 걸 알아차렸으면서도 고지훈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갑자기 출장이 잡혔어. 천희도 데리고 갈 거야.”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고지훈은 재빨리 전화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임해연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자, 고지훈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마치 부드럽게 결을 따라 털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만난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뜬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5년 전, 고지훈이 나를 쫓아다니던 시절에도 그는 저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자, 고지훈은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너 요즘 애한테 관심도 없잖아. 내가 애를 데리고 가도 불만 없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싸우지도 않았고, 변명하지도 않았다.
고지훈은 능숙하게 신발 끈을 묶은 뒤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거센 소리에 벽에 걸려 있던 결혼사진이 흔들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 액자가 깨지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맑고 경쾌하게 들렸다.
나는 쪼그려 앉아 깨진 유리 조각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그러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자면 되겠다.
잠자리에 들려는데, 임해연의 SNS 게시물이 갑자기 눈앞에 떠올랐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네가 좋아하는 걸 모두 기억해 주는 사람이야.]
사진 속 천희는 고지훈과 임해연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었고, 임해연은 고지훈의 어깨에 다정하게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누가 봐도 행복한 세 식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한정판 명품 가방은 어제 고지훈이 들고 나갔던 바로 그 가방이었다.
댓글창은 마치 결혼식이라도 열린 것처럼 떠들썩했다.
고지훈의 친구 강인호가 가장 먼저 댓글을 달았다.
[형수님, 이 가방 하나 사려면 다른 물건까지 같이 사야 한다던데, 그것만 해도 2억은 기본이라면서요! 우리 고 대표, 미인 한 번 웃게 하려고 통 크게 쐈네!]
문득 작년 내 생일이 떠올랐다.
그날 고지훈이 내게 선물한 건 할인 매대에서 산 스카프였다.
그때도 강인호가 옆에 있었다.
“20만 원짜리 스카프로 끝이야? 고 대표, 누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러자 고지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얘는 원래 이런 할인 상품 좋아해.”
나는 스카프를 손에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몰랐다.
내가 늘 할인 매대 앞을 서성였던 이유는 돈을 아껴 두 부자에게 더 좋은 것을 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고지훈의 친구들은 나를 한 번도 ‘형수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대놓고 무시했을 뿐 아니라, 뒤에서는 늘 이런 말을 했다.
“임해연은 여민지보다 3살이나 어린 데다 명문대까지 나왔고, 사람 상대하는 법도 얼마나 잘 아는데.”
제5화
“여민지는 하루 종일 의심이나 하니까 보기만 해도 짜증 나.”
고지훈의 사교계에서 나는 그저 웃음거리였다.
남편에게 죽자고 목매는 본처, 고지훈이 진정한 사랑을 좇는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
그러다 내 손가락이 갑자기 멈췄다.
고지훈이 댓글을 남긴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해연이만 행복하면 그걸로 됐지.]
뒤에 붙은 세 개의 태양 이모티콘이 내 눈을 찔렀다.
강인호가 곧바로 그 뒤를 이었다.
[어떤 사람은 또 난리 치겠네. 아무리 정실부인 행세를 해도, 해연이 좋아한다고 한마디만 하면 끝이잖아!]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구를 말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SNS 화면을 닫았다.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신 뒤 깊이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고지훈이 잔뜩 화난 얼굴로 캐리어를 끌고 침대 곁에 서 있었다.
아들까지 데리고 있었다.
“남편이랑 아들이 밖에 있는데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연락 한 번도 안 하면서 그렇게 푹 잘 수 있어?”
“이제 나랑 아들은 네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된 거야?”
나는 말없이 고지훈을 바라봤다.
예전에는 고지훈이 비행기에서 내렸는지, 호텔에는 도착했는지, 밥은 뭘 먹었는지 하나하나 신경쓰며 내내 걱정했다.
그러면 고지훈은 내가 귀찮다며, 쓸데없이 참견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자, 이번에는 나더러 자신을 무시한다고 했다.
“당신이 출장 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방해하지 않은 거야.”
“게다가 당신과 아들 곁에는 임해연도 있었잖아.”
고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내가 임해연의 이름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고지훈은 붉어진 얼굴로 애써 진정했다.
“나랑 해연이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내가 예전에 진 빚이 있어서 갚는 것뿐이야. 대체 몇 번을 더 설명해야 믿겠어?”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고지훈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입가에 적당히 미소를 띠었다.
“설명 안 해도 돼. 나도 다 이해해.”
고지훈은 옆에 서 있던 아들을 살짝 떠밀었다.
천희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플라스틱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이거 내가 용돈으로 엄마 주려고 산 거야!”
“엄마가 나한테 잘해주진 않지만, 아빠가 그랬어. 원한을 덕으로 갚아야 한댔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천희의 손을 밀어냈다.
“마음만 받을게. 그건 해연 이모한테 줘.”
그러자 고지훈이 버럭 소리쳤다.
“여민지! 너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아들이 먼저 화해하자고 했는데,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지금 뭐가 잘났다고 계속 그렇게 외면해?!”
나는 고지훈을 상대하지 않고 주방으로 가서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랐다.
“일찍 자.”
나는 고지훈의 분노 어린 시선을 뒤로한 채 침실 문을 잠갔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얇은 커튼 사이로 침실에 스며들었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5년 동안 살아온 집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봤다.
내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한때 가장 소중했던 사람들도 모두 버렸다.
고지훈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일어났다.
고지훈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 방에 있던 물건들까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고지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내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밀려왔다.
고지훈은 차 키를 움켜쥔 채 내 직장이었던 설계원으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원장이 고지훈을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왔다.
“어머, 고 대표. 여긴 웬일인가?”
“민지 퇴사 처리하면서 아직 안 끝난 일이 있어?”
고지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손에 들고 있던 차 키가 바닥에 떨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퇴사했다고요?”
원장 역시 놀란 듯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래. 민지는 사흘 전에 이미 퇴사했네.”
“케임브리지에서 앞으로 5년간 공부한다던데, 자네 몰랐나?”
“오늘 비행기라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지도 모르겠군...”